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인도 쿠시나가르의 부처 열반상 |
위대한 성인의 탄생지와 사망지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겐 가장 핵심적인 성지로 불리고 그곳을 방문해 본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들에게도 그러했다.
열반을 눈앞에 둔 부처에게 한 제자가 교단의 후계자를 어떻게 할지 묻는다. 이에 부처는 불교 교단에는 후계자가 없음을 못 박으며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서 나가면 된다”고 했다. 즉,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내용이 됐다.
불교에선 ‘스스로 깨달음’을 핵심으로 하는데, 그 깨달음의 완성을 열반으로 본다. 불기(佛紀)라는 연대 표기법은 불멸기원(佛滅紀元)을 줄인 말로 석가모니가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삼는다. 부처는 기원전 544년에 열반했으니 올해 불기는 2025년에 544년을 더하면 2569년이 된다.
전 세계가 표준화된 시간체계로 사용하고 있는 기원전(B.C.)과 기원후(A.D.)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점을 기준으로 나눈다. 우리가 쓰는 서기(西紀)는 이러한 ‘서양의 달력’에서 유래했다. 동남아에선 황제나 왕의 즉위를 중심으로 하는 연호를 사용했는데, 우리나라도 단군왕검이 왕위에 오른 시점인 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하는 단기(檀紀)가 있다.
네팔 룸비니동산 보리수나무 |
부처는 고대 인도·네팔 지역(히말라야 동부지역) 부족 중 하나인 석가족 출신으로 ‘석가모니’는 ‘석가족의 성자’라는 말이다. 부처의 본명은 ‘고타마 싯타르타’로 석가족 부족의 소왕국 정반왕과 인접 콜리야족 귀족인 마야부인 사이에서 첫째 왕자로 룸비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룸비니에서 자동차로 4시간 거리인, 그리 멀지 않은 쿠시나가르에서 80세의 일기로 열반했다.
우리들의 성지순례 코스는 생(生)과 사(死)의 순서가 바뀐 쿠시나가르 열반지에서 네팔 국경을 넘어 탄생지 룸비니 동산으로 이어졌다.
룸비니동산으로 가기 위해 네팔 국경을 지나는 모습 |
부처의 탄생지 네팔의 룸비니 동산은 인도와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고, 부처가 주요 활동했던 지역들과도 인접해 있다. 부처의 석가족은 네팔과 인접한 인도에 있었고 마야부인의 친정 콜리성은 지금의 네팔 쪽에 있었던 듯하다. 마야부인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부처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도중 중간쯤에 있는 룸비니 동산에서 부처를 출산하고 7일 만에 죽음에 이른다. 아마 만삭의 몸으로 장거리를 힘들게 이동하는 과정으로 인해 그러했을 것이다.
네팔 출입국사무소 모습 |
여행 가이드는 인도에서 네팔 국경을 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입출국자가 많아서라기보다는 입출국 업무처리 담당자들이 쉬엄쉬엄하기에 대기시간이 길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일행은 여기저기 도움을 받아 네 시간의 예상 시간을 두 시간 정도로 단축해서 통과했다. 늦은 시간 네팔 숙소에 도착하다 보니 당일엔 말 그대로 잠만 자고, 다음날 새벽에 룸비니 동산을 방문하고 네팔을 떠나야 했다. 네팔의 문화를 접해볼 시간과 기회를 갖지 못한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네팔 룸비니 마야데비당 |
숙소 지척에 있어 자욱한 새벽안개를 벗 삼아 룸비니동산을 찾아갔다. 입구부터 기나긴 바닥 길을 신발을 벗고 마야데비 사원, 아기 부처를 목욕시킨 싯다르타 연못, 보리수나무 기도처, ‘근심이 없는 나무’라는 무우수(無憂樹) 나무 등을 둘러봤다.
마야데비당 내부 |
마야데비당 안에는 모든 사진 촬영을 못하도록 군인 복장을 한 감시원들이 매의 눈으로 지키고 있었다.
마야부인의 발자국 돌판 |
그러나 마야부인이 부처를 출산할 때 잡고 있었다는 무우수 나무 아래 마야부인의 발자국이라는 돌판을 사진에 남기고자 많은 이들이 감시원들의 눈을 피해 요령을 내고 있었다.
마야데비당 앞 싯다르타 연못 |
마야데비당 바로 앞에는 아기 부처를 목욕시켰다는 연못이 공원처럼 잘 정돈돼 있고, 연못 반대편에는 커다란 보리수나무 아래 기도처가 마련돼 있다. 큰 보리수나무는 룸비니 동산의 역사와는 무관하지만 불교에서 상징성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그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연못 근처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외국 스님 |
연못 주변에는 이른 새벽 시간임에도 오체투지를 하는 외국 스님을 만날 수 있었고, 마야데비 사원 옆 아소카 석주는 2000년의 세월을 입증하고 있다.
마야데비 사원 옆 아소카 석주 |
비록 석주의 상륜부는 사라지고 일부가 땅에 묻혀있는 듯 5~6m 정도만 밖으로 노출되어 있지만 이곳이 탄생지임을 알려주는 아소카 석주가 주는 상징성만큼은 강렬했다.
무우수 나무 |
앞마당에는 언제 심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이 ‘무우수 나무’이구나!”를 알려주려는 듯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룸비니 동산은 부처 탄생지라는 명성에 비해 성불했던 부다가야나 열반지 쿠시나가르보다는 남겨지는 잔상이 약했다. 아마도 네팔에서의 아주 짧은 일정과 타 성지에 비해 규모의 왜소함도 영향을 미친 듯하다.
네팔에서 인도로 넘어가기 위해 국경지대에서 대기 중인 정용식 ㈜헤럴드 상무 모습. |
다시금 경계도 불명확하게 느껴질 정도로 섞이고 난잡스러운 인도 네팔 국경지대를 지나며 국경이 아닌 경계 지점에 있는 장터같은 느낌이 지울 수 없다.
인도 쿠시나가르 부처 열반지 |
바이살리는 부처가 가장 좋아했던 도시라고 한다. 지역민들 모두가 부처를 좋아했던 곳이기에 열반에 들어가기 위한 여정의 마지막 안거처로서는 그만한 곳이 없었으리라. 바이살리에서 조그만 시골마을 쿠시나가르까지는 차로 다섯 시간이나 걸렸다. 부처는 라즈기르 영축산에서 출발해 바이살리를 거쳐 열반으로 가는 이 길을 3개월 동안 걸어갔다. 가는 도중 파바에서 금세공업자인 ‘춘다’의 마지막 공양을 받았다. 음식에 중독돼 설사병을 앓기도 했지만 부처는 춘다의 공양이 최고의 공양이라고 오히려 찬탄해 주며 자책감에서 벗어나게 했다. 차로 이동 중에 ‘저곳이 춘다의 공양처’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도 자신 때문에 힘들어할 상대를 위로하면서 갔던 부처의 마음을 되새겨본다.
인도 쿠시나가르 부처 열반당 |
부처는 쿠시나가르에 도착해 근처 강에서 목욕하고 사라수 두 그루 사이에서 북쪽으로 머리를 둔 채 침상 위에 발과 발을 포개고 오른쪽 옆구리를 붙여 사자처럼 누웠다.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말라족들이 부처의 발에 입 맞추며 예배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곳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다.
굽타왕조 시기인 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열반 당시 누워있던 모습을 형상화한 열반상은 1862년에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됐다. 열반상을 모신 지금의 열반당은 벽돌로 만든 현대식 건물로 미얀마 스님들이 1920년경에 세웠다.
순례단이 열반상 부처님에게 가사공양을 하며 행진하는 모습 |
열반상 부처님에게 가사 공양을 하기 위해 공원 입구에서부터 순례단은 6m 크기의 황금색 큰 가사를 펼쳐 한 쪽씩을 잡고 석가모니불을 외치며 열반당까지 행진했다.
열반상 |
열반당을 한 바퀴 돌고 내부로 들어가니 많은 이들이 참배하고 기도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지만 다행히 안내를 받아 부처님의 큰 발과 얼굴을 제외하고 가사를 덮어드리고 나서 헌화했다. 열반상은 길이 6.1m로 부처님의 상호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하는데 몇 바퀴를 돌아봤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열반상 |
열반상 기단부는 아름다운 문양과 함께 세 명의 인물이 새겨져 있다. 왼쪽부터 부처의 유해를 칠보장식 웃옷으로 감싸준 여인 ‘말리카’, 기부자인 ‘하리발라 스님’, 제자 아난존자 순으로 돼있다. 새겨진 이들이 누군지 알 리 만무하지만 모두가 특이한 모습이다.
열반탑 |
열반당 뒤에는 아소카왕이 처음 세웠다는 45m 높이의 거대한 원형의 돔 같은 열반탑이 있다. 어떤 이들은 부처의 사리탑이라고 설명한다.
탑돌이를 하고 열반 탑 앞에 순례단 모두는 앉아서 잠시 이곳이 부처의 열반지임을 다시 한번 각인하며 명상의 시간을 가져본다. 열반탑 주변에는 예불을 드리는 여러 나라 불자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사라수 |
부처가 열반할 때의 사라쌍수는 지금 없지만 그때를 기념하기 위해 열반당 먼발치에 두 그루 사라수를 심어 당시의 사라쌍수를 연출하고 있다.
부처 열반지 인근의 다비장 라마바르 탑 |
열반지 인근에 부처의 다비장이 있고 다비장에는 원형 위에 원형이 올려져 있는 모양의 ‘라마바르 탑’이 세워져 있다. 주변 정비가 잘 돼있어 많은 불자와 스님들이 탑돌이하며 생각을 정리해 보기에 좋도록 공원처럼 깨끗하게 꾸며져 있다. 부처의 유해를 화장한 다비처에 건립한 라마바르 탑은 원래 이 지역 말라족 왕족들의 대관식을 치르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부처를 위해 보시했다. 이곳에는 부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제자 마하가섭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순례단이 라마바르 탑에서 탑돌이 하는 모습 |
다비를 마친 부처의 사리는 부처의 활동과 관련 있는 8개국(부족)에 분배됐고 2개의 부족은 재와 사리를 담았던 항아리를 갖게 돼 당시엔 10개 부족 지역에 사리탑이 건립됐다. 성지 어디를 가나 발굴하다만 용도를 알 수 없는 옛 벽돌 터의 흔적들이 무언의 손짓으로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다. 탄생지 룸비니 동산에도, 열반지 열반당 주변뿐만 아니라 다비장 주변까지도.
“그대들이여 방일(放逸, 멋대로 거리낌 없이 놀다)하지 마라…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 덧없음)일 뿐이나니….” 이것이 제자들에게 하는 부처의 마지막 유언이고 당부였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