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철금속은 반도체와 자동차, 건설 등 전 산업 분야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기초소재다. 비철금속 제련업이 국가기간산업으로 인정받고, 관련 기술 상당수가 국가핵심기술로 선정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고려아연은 아연·연·은·인듐 4가지 금속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는 비철금속 제련 글로벌 1위 기업이다. 전 세계 유일하게 아연-연-동 통합공정을 운영하며 현재 아연 및 연정광 안에 포함된 극소량의 희소·희귀금속 12가지를 추출하는 핵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고려아연을 향한 재계 안팎의 시선은 이런 타이틀과 기업가치가 아닌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이하 MBK)·영풍 측과 벌이는 ‘경영권 분쟁’에만 쏠리고 있다.
고려아연의 모기업인 영풍그룹은 1949년 11월 최기호·장병희 공동 창업주가 설립한 ‘영풍기업사’가 모태다. 공동 창업주 후손들이 지분을 나눠 유지해 온 76년간의 동업관계는 지난해 고려아연이 3세 경영 체제로 전환하면서 금이 갔다.
최씨 가문은 영풍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고려아연을 운영하고, 영풍그룹 전체와 전자 계열사는 장씨 집안이 맡았다. 하지만 두 집안 간의 분쟁은 수개월째 진행형이다. 명예훼손을 비롯해 상호 간 소송과 비방전은 그 수만 헤아리기도 열 손가락이 턱없이 모자라다.
이 과정에서 영업기밀에 준하는 내용들이 여과 없이 공개되고,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폭로전이 이어지는 사이, 기간산업에 미칠 부작용보다 오로지 ‘요동치는 회사 주가’라는 잿밥에만 관심을 두는 이들도 하나둘씩 늘었다.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서 회사가 갖춘 기술력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브랜드 이미지’다. 시장에서 고려아연과 MBK·영풍 간 경영권 다툼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양측 간 분쟁은 사실상 승자 없이 모두가 손해를 보는 ‘치킨게임’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게임이 단순한 몇 사람의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천 명의 임직원을 넘어 협력사, 납품업체 등 수만 명이 고려아연 사태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고려아연 노조는 ‘일터와 안정된 근무 환경을 지키겠다’며 이미 대타협이 불발될 경우 총파업 카드를 꺼내 들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제라도 ‘격투장’에서 내려와 협상테이블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최근 고려아연이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반가운 일이다.
지난달 24일 박기덕 고려아연 대표이사는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인해 고려아연과 계열사의 모든 임직원뿐만 아니라 그 가족, 그리고 협력사와 고객사분들께 큰 불안감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며 MBK에 협력을 제안했다. 나아가 MBK 측 추천 인사가 이사진에 포함될 수 있도록 이사회를 전향적으로 개방하고, 경영 참여의 길까지 터줄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제는 MBK·영풍 측이 화답할 차례다. 차를 타고 마주 달리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도 핸들을 틀지 않는다면 공멸할 수밖에 없다. ‘세계 1위’ 타이틀을 가진 국내 기업의 붕괴는 글로벌 경쟁사들에 최고의 기회이자, 최상의 시나리오가 될 수밖에 없다.
이미 고려아연 핵심 기술진은 “MBK·영풍이 경영권을 장악할 시 퇴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국가핵심기술 유출과 노동자 총파업에 따른 한국 산업계 전반의 도미노 충격이라는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의미 없는 소모전을 멈춰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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