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제시하는 도서들 “문제는 공공의료”
정부의 방임 이대론 안돼…혼합진료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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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내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아프지 말자. 다치지 말자.”
정부가 의료 개혁의 일환으로 의대 정원 증원을 발표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간 의사들의 집단 반발로 의료 공백이 상시화하면서 시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해야 한다’는 말로 안부 인사를 대신하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 사이의 싸움에 애꿎은 환자들만 등이 터지는 형국이다.
응급실 뺑뺑이, 소아청소년과 오픈런, 서울 대형병원 앞 환자방, 지역 종합병원 줄폐업 등 의료 체계의 붕괴는 곳곳에서 목도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해결책은 정치 문제와 이권 다툼에 매몰된 채 협상 테이블에도 오르지 못한 상태다.
보건의료 전문가인 나백주, 정형준, 제갈현숙은 신간 ‘의료재난의 시대’에서 현재 한국의 의료 현실을 ‘의료재난’으로 규정한다. 이는 일단 재난이 발생했을 때 더 이상의 인체 피해와 합병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땅히 작동해야 할 의료안전망의 부재와 그로 인한 혼란으로 발생하는 추가적 사회재난을 뜻한다.
저자들은 의료재난이 보건의료 체계의 공공성 부족에서 기인했다고 지적한다. 환자, 의료진, 병원을 모두 시장자유주의에 맡기는 시장 중심의 의료 공급 구조가 한국을 영리의료 일번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국은 건강보험 보장성(비급여를 포함한 총진료비 중 건강보험에서 부담하는 비율)이 2020년 기준 6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외과 수술 등 필수의료 영역에서는 보장성이 낮지만, 영상의학검사 등의 영역은 보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 민간병·의원에서 수익이 높은 의료 영역을 과도하게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용 목적의 성형시술, 도수치료 등도 이에 해당한다.
비필수의료 영역의 비급여진료가 지나치게 활성화한 것도 원인이다. 아울러 급여진료와 비급여진료를 동시에 받는 혼합진료로 인해 의료 이용이 과도하게 늘고 있는 점도 문제다.
보건의료 자원의 지역 간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2018년에는 서울시의 인구 1000명당 평균 의사 수는 전국 평균의 1.52배였지만, 2022년 7월 현재는 1.58배로 격차가 더 벌어졌다. 시도별 인구당 병상 수(2020년 기준)도 가장 낮은 울산시와 경기도가 인구 1000명당 1.3개인 데 반해 가장 높은 서울시와 부산시는 2.8개로 2배 이상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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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재난의 시대’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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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 케이스’ 표지 |
이 같은 격차에는 공공병원 부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공병원이 전국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병원 수 기준 약 10%, 병상 수 기준 약 5%로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1977년 본격 시행된 의료보험은 군사정권의 정치적 이해에만 충실한 실효성 없는 법제화와 국가와 자본가의 책임 회피 경향이 ‘경로 의존성’으로 자리 잡아 국가의 재정 책임 최소화와 공공의료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낳고 있다.
의료계가 저수가 프레임을 내세우며 행위별 수가제에 근간을 둔 진료비 지불 방식을 주장하는 것도 수십 년간 이어지며 영리의료를 가속화했다. 이러한 영리의료 중심의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의대 정원을 늘려도 필수의료, 공공의료 공백은 해결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윤희숙의 신간 ‘콜드 케이스’도 한국 경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 5가지 장기 미해결 과제 중 하나로 의료 시스템을 꼽고, 국가의 과소 투자가 현재의 많은 문제를 낳은 근원이라고 진단한다. 해방 전인 1942년에는 국공립병원이 전체 병원의 38%를 차지하고 병원 규모, 병상 수, 의료 장비 모두 사립병원보다 월등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 정부 재정 지출에서 소외되면서 국공립병원은 시설이 낙후되고 비중도 낮아졌다.
국가가 의료시장을 방임하고 의료계는 의료의 본질보다 이윤 추구에 급급한 사이 피해를 보는 건 대다수의 서민이다. 한국은 경상의료비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에 이를 정도로 총의료비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높지 않은 상태에서 질병 치료를 위해 개별 가구에서 지출해야 할 비용이 계속 올라가 가계에 심각한 부담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저출생과 초고령화에 직면한 시점에서 공공의료 강화는 더욱 시급한 과제가 됐다. ‘의료재난의 시대’는 이를 위해 혼합진료를 금지하고, 의학적으로 필요한 의료 서비스의 건강보험 급여화를 적극 추진해 건강보험 보장률을 적어도 OECD 평균까지 올려야 한다고 제언한다. 또한 의료비 지출 구조의 합리화와 지역 보건의료 강화를 위해 의료전달체계도 정상화해야 한다고 짚는다.
‘콜드 케이스’도 중증질환 치료 등 건강보험이 꼭 지불해야 할 필요의료 서비스를 확대하는 차원에서 비급여를 줄여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빅5 병원’을 4차 병원으로 승격해 현재 1~3층으로 이뤄진 의료기관 층위를 4층으로 증축하고, 리베이트나 간납업체의 구매 대행 등으로 높아진 약품 가격을 낮추는 방안을 제시한다.
의료 체계의 붕괴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지만 디스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로 갈 수 있는 길은 아직 남아 있다.
의료재난의 시대/나백주·정형준·제갈현숙 지음/동아시아
콜드 케이스/윤희숙 지음/천년의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