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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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보은군 법주사 전경 |
예전엔 수학여행 필수코스로 오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찾아왔지만 무심히 지나쳐 보지 못했던 ‘호서제일가람 법주사’란 일주문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국보, 보물 등 문화유산도 많고 사찰 이름 또한 ‘부처님이 머물렀다’는 뜻의 법주사(法住寺)다. 충청도를 일컫는 호서(湖西)제일가람이 아닌 우리나라 최고를 일컫는 동국(東國)제일가람, 해동(海東)제일가람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듯한데 오히려 겸손하게 다가온다.
해발 1507m의 천왕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이라고 불렸던 속리산의 기암괴석 절경이 연꽃 모양으로 법주사를 빙 둘러싸고 있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경치가 뛰어나 국립공원과 명승으로 지정된 속리산은 국토의 등줄기 백두대간의 중심이다.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세 갈래 물줄기는 남한강, 낙동강, 금강의 발원지로서 한반도 기운의 중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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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보은군 법주사 입구의 정이품송 |
법주사 들어가는 초입엔 세조가 신미대사를 만나러 이곳을 방문했을 때 가마가 가지에 걸리자 나무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벼슬을 받았다는 ‘정이품송’ 소나무가 먼저 맞이한다. 예전에는 크고 반듯하며 좌우 균형이 맞아 원뿔 모양으로 아름다움을 한껏 뽐냈는데, 600여년 이상의 세월을 버티면서 강풍과 폭설 등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은 한쪽이 허전해진 모양새다.
고려 31대왕 공민왕이 왔었고, 세종대왕은 주지스님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한글 창제 과정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세조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할 정도로 왕들과 연이 깊은 사찰이다.
국보와 보물이 많아 수학여행 코스이기도 했던 유명세가 지금까지도 이어져 주말이면 1만 여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하니 상가들도 생동감 있어 보인다. 상가 입구에 있는 속리산 버스터미널을 보니 젊었을 적 버스 타고 이곳에 놀러 왔던 기억까지 새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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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
법주사 보물 목록에 있는 복천암의 ‘수암화상탑’과 ‘학조화상탑’이 궁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복천암은 법주사에서 세조가 심신을 달래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갔다는 ‘세조길’을 따라 1시간은 족히 걸어 올라가야 하는 먼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주문에서 금강문까지 0.9㎞, 금강문에서 복천암까지 3.2㎞ 계곡을 따라가는 ‘세조길’로 복천암을 먼저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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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길 |
속리산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문장대(1054m)를 오르는 산행길이라 등산객들도 많고, 세조가 심신을 달래기 위해 목욕했다는 목욕소도 계곡 어디쯤 있을 듯 보인다. 탈골암을 조금 지나가니 ‘세심정(洗心亭)터’라는 곳에 등산객들을 위한 먹거리 쉼터도 있다. ‘세속을 떠나 마음을 씻는다’는 정자(터)로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하산 길에 막걸리로 목을 축이기에 딱 좋은 곳이다.
“눈 앞에 보이는 일부터 미루지 말고 확실히 즐겁게 하면 ‘생활의 도인’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미리 걱정하면 당신은 바보입니다.”
세심정 안내판의 글귀가 유별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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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암 |
고려 공민왕은 복천암에 와서 극락보전에 ‘무량수(無量壽)’라는 친필 편액을 내렸다. 세종은 범어에 능통했다는 복천암주지 신미대사를 왕궁으로 불러 한글창제 작업에 도움을 청했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왕궁에서 신미대사와 인연을 맺어 왕이 된 후 신미대사를 찾아 복천암에 와서 나라의 번창을 비는 대법회를 3일간 열었다. 세조는 복천암 석간수를 마시고 감탄하며 이곳에서 지친 심신을 위로받고 신미대사의 청에 의해 오대산 상원사에 가서 문수동자를 만나 괴질이 나았다고 한다. (상원사에 ‘문수동자상’ 유래가 있다.)
정이품송은 세조가 복천암에 오다가 생긴 일화이며, 세조 때 불경을 한글로 번역 출간한 간경도감(刊經都監) 설치도 신미대사의 영향이라고 전해진다. 극락보전에서 공민왕의 친필을 찾을 순 없어도 복천암(福泉庵)은 ‘왕들이 다녀간 절’이었고 그 중심에 ‘신미대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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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수암화상탑, 학조화상탑 |
복천암은 속리산 문장대 올라가는 중턱 경사진 곳에 걸쳐 있어 조용히 수행하는 선방으론 최적의 장소이다. 복천암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보고 싶은 두 탑을 찾질 못해 결국 종무소의 도움을 청하니 암자 뒤 산길로 올라가라고 한다. 이정표는 없지만 200여m를 무작정 오르다 보니 구릉 지역에 깨끗이 정돈된 구역에 팔각 기단의 2기의 구형(球形) 사리탑이 조성돼 있다. ‘수암화상탑’과 ‘학조화상탑’은 탑 주인과 건립연대가 기록된 조선 초기의 탑인데 별다른 조각이나 장식 없이 부드러운 곡선의 담백한 부도탑이다. ‘수암화상탑’은 세종과 세조와 인연이 있던 신미대사(1403~1480년)의 부도탑이고 ‘학조화상’은 ‘수암화상’의 제자로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합천 해인사를 중수하기도 한 고승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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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선원 |
법주사는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대사를 위해 연회를 베풀기도 했고, 대웅보전 뒤에는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원당인 선희궁 원당이 있다. 흥선대원군 때는 경복궁 재건에 사용하고자 사찰 내의 커다란 미륵장륙상과 철당간을 가져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렇듯 법주사는 좋든 싫든 왕가(王家)들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금강문 |
법주사(法住寺)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며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공주 마곡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명찰이다. 일주문을 한참 지나 정문인 금강문에 들어서니 짧은 거리에 천왕문, 팔상전, 대웅보전까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그 좁은 공간 안에 국보 3점, 보물 13점 등 수많은 문화재들이 집중돼 있다. 산 중턱에나 있을 법한 마애불도 지척에 있다.
533년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인도에 갔다가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녔다. 지금의 터에 이르러 흰 노새가 발걸음을 멈추고 울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산세가 험준하고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졌다고 한다. 이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777년 진표율사가 중창했으며, 고려시대를 거치며 대찰의 규모를 갖췄으나 정유재란으로 전소됐다. 선조, 인조 시대를 거치며 사명대사 및 벽암대사가 중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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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
법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 많은데 그중 우리나라 수많은 탑 가운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목탑인 국보 제55호 팔상전이 있다. 560㎡(170평)의 상당히 거대한 대웅보전(보물)도 흔치 않은 중층(2층) 건물로 마곡사 대웅보전,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불전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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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
대웅보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소조불인 비로자나불이 있고, 앞 계단에는 왕이 자주 왔던 절이었음을 증명하듯 ‘임금님 가마가 지나는 길(답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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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희견보살상 |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이 있는 원통보전(보물) 옆 사방이 트인 전각 안에 2m 정도의 석조 희견보살상(보물)도 법주사에만 있는 특이한 보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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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보전 목조관음보살좌상 |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몸을 소신공양하였던 희견보살이 뜨거운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인데 긴 세월을 이기지 못한 듯 많이 훼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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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당간 |
경복궁 재건을 위해 흥선대원군이 수거해간 22m 철당간은 신라시대 당간지주(幢竿支柱)에 다시 복구해 하늘을 찌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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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련지 |
그 옆에는 거대한 연꽃을 떠받치고 있는 화로 모양의 돌로 만든 작은 연못인 ‘석련지(石蓮池)’도 국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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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사자 석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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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 석등 |
팔상전과 대웅보전 사이에 두 마리의 사자가 연꽃을 받들고 있는 쌍사자 석등(국보)과 사천왕을 사면에 조작한 사천왕 석등(보물)이 일렬로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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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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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항아리 석조 |
금강문 오른쪽에는 둘레가 10.8m, 높이 1.2m의 수천 명 배식에 사용했던 큰 쇠 가마솥인 철솥(보물)이 있다.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돌 항아리 ‘석조’ 등 사찰에선 보기 힘든 문화재가 많은 곳이 법주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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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 |
팔상전(八相殿)은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인조 때 벽암스님이 주도해 다시 지은 것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탑 중 유일하게 근대 이전에 지어진 5층 목탑이다. ‘팔상전’이라는 이름 때문에 8층 목탑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벽면에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에서 중요한 8가지를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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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 내부 팔상탱화.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된 ‘도솔래의상’과 ‘비람강생상’ |
팔상전은 법주사를 처음 만들 때 세워진 것으로 보다 날렵한 전형적인 고대식 목탑의 형태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재건되면서 1층 면적이 늘어나 외형이나 구조가 상당히 특이한 지금의 모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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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 내부 팔상탱화. 부처님의 출가 전 상황을 그린 ‘사문유관상’과 ‘유성출가상’ |
거대한 중심 기둥인 심주를 중심으로 내부는 통층이며 높이는 22.7m, 정방형 모습으로 금산사 미륵전이 연상된다. 팔상전은 ‘사리장엄구’가 나온 탑으로서 우리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고 하나뿐인 목조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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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 내부 거대한 중심 기둥 |
팔상전 내부에는 5층 전체를 통과하는 거대한 중심 기둥이 있다. 이 기둥의 네 면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구분해 각각 이름을 붙인 8폭의 팔상탱화가 각 면에 두 폭씩 있다. 그 앞에는 탱화와 연계된 각기 다른 모습의 부처와 협시불, 나한상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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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 내부 팔상탱화. 부처님의 수행 과정을 그린 ‘설산수도상’과 ‘수하항마상’ |
팔상도는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된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출가 전의 상황을 그린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 수행 과정을 그린 ‘설산수도상’ ‘수하항마상’, 설법하는 모습과 열반을 그린 ‘녹원전법상’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돼 있다. 누구나 자유스럽게 내부에 들어가서 4면을 돌아보며 기도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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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 내부 팔상탱화. 부처님의 설법하는 모습과 열반을 그린 ‘녹원전법상’과 ‘쌍림열반상’ |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요람임을 상징하듯 높이 33m인 동양 최대의 거불이라는 ‘금동미륵대불’이 절 전체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청동미륵장륙상을 세웠다고 하는데 187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에 사용할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몰수해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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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 내 금동미륵대불 |
이에 1939년에 당시 주지스님이 의뢰해서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김복진이 시멘트로 법주사 미륵불상 조성을 추진했으나 한때 중단됐다가 1964년에 제작 완공했다. 이후 1986년에 콘크리트 대불을 해체하고 높이 8m 화강암 기단 위에 25m 높이 청동불상을 조성했다. 이후 개금불사를 시작해 2002년 현재의 금동미륵대불로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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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의좌상 |
금강문 앞을 흐르는 계곡 쪽 큰 바위에는 높이 6m가 넘는 미륵불인 마애여래의좌상(보물)이 암각화돼 있다. 의자에 앉아 연꽃잎 위에 발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그 오른쪽 바위 면에는 법주사 창건 설화와 관계된 암각화가 있다.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 오는 모습과 진표율사 앞에 꿇어앉은 소와 소 주인이 머리를 깎고 법을 구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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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래암 |
마애불 옆에는 수정봉에서 굴러왔다는 높이 20m에 육박하는 마름모꼴 거대한 바위인 추래암(墜來岩)이 위압감을 주며 지키고 있다. 추래암이 암자인줄 알았는데 수정봉에서 굴러떨어졌다는 기(氣)가 쎈 큰 바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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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선사 부도탑과 부도비 |
고려시대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법주사에 주석하며 수차례에 걸쳐 중창이 이뤄졌다. 문종의 다섯째 아들인 도생승통이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원종 때 미수대사는 왕명으로 각종 경전 92권을 편찬하기도 했다. 법주사 고승 중 더 기억할 만한 두 스님으론 임진왜란 이후 법주사를 중창한 벽암각성스님과 금오 문중을 일으킨 현대불교의 거목이라는 금오선사가 있다.
벽암(碧岩)대사(1574~1659년)는 임진왜란 이후 법주사를 중창하신 분으로 초대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에 임명돼 남한산성을 축성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 의승(義僧) 3000명을 모집해 참전했다. 법주사를 비롯해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합천해인사, 완주 송광사 등 중창에도 큰 역할을 했다. 화엄사에서 입적하자 영골(靈骨)을 네 곳으로 나눠 순천 송광사, 구례 화엄사, 완주 송광사, 법주사에 부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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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상 밑 도요토미 히데요시, 청나라 태종 |
법주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라는 천왕문이 있다. 그곳에는 벽암 스님이 임진왜란 이후 불법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고자 불에 잘 타지 않는 소조(흙)로 6m의 사천왕상을 만들었다. 특히 동방지국천왕은 임진왜란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태종을 악귀처럼 왼발로 밟고 있다.
경허·만공·보월로 이어지는 덕숭 문중의 선맥과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금오선사 태전(1896~ 1968년)은 김천 직지사, 팔공산 동화사, 지리산 화엄사, 쌍계사, 칠불선원, 서울 봉은사, 도봉산 망월산, 수덕사 등의 조실을 맡아 후학을 양성했다. 해방 후 대처승 정화를 위해 정화불사운동을 펼쳐 1954년 전국비구승대회 추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58년부터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교단 청정운동에 매진했고 1968년 법주사에서 입적했다. 금오선사는 금오 문중을 일으켜 용성문중과 쌍벽을 이루며 조계종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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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대사비 |
법주사 금강문을 바라보는 초입 길가엔 속리산의 내력이 기록된 ‘속리산 사실기비각’ 옆에 ‘벽암대사비(碧岩大師碑)’가 대사의 행적을 전하고 있다.
법주사 입구쪽 고승들의 사리탑을 한 곳에 모은 부도전과 별도로 추래암 옆에 금오선사의 사리탑과 부도비군이 마련돼 있다.
법주사에서 두 고승의 위상을 느끼게 한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