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태종에게 “미치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는 원경왕후의 주도적 삶…실제와 상상[서병기의 문화와 역사]

원경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tvN X TVING 오리지널 드라마 ‘원경’은 남편 태종 이방원(이현욱)과 함께 권력을 쟁취한 원경왕후(차주영)를 중심으로 왕과 왕비, 남편과 아내, 그 사이 감춰진 뜨거운 이야기를 그렸다.

태종 이방원의 입장과 관점에서는 조선개국기가 여러 차례 다뤄졌다. 하지만 원경왕후가 중심이 된 전개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사극은 주로 남성들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여성들은 부차적인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극은 그리 많지 않다. 소재도 제한적임을 알 수 있다. 1971년 윤여정 주연의 MBC ‘장희빈’, 82년 이미숙 주연의 MBC ‘여인열전-장희빈’, 88년 숙종(강석우)의 여자인 장옥정(전인화)과 인현왕후(박순애)가 주연인 MBC ‘조선왕조 500년-인현왕후’, 95년 정선경 주연의 SBS ‘장희빈’, 2013년 김태희 주연희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방영됐다.

조선 중기 권신인 윤원형의 애첩이었던 정난정(강수연)의 일생을 그린 SBS ‘여인천하’(2001~2002년)와 세조의 맏아들로 왕을 해보지 못한 조선 추존국왕 덕종(의경세자)의 부인인 인수대비(채시라)와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전혜빈), 조선왕조 최초의 대비 정희왕후(김미숙) 등 권력을 둘러싼 세 여인의 인연과 악연을 다룬 JTBC ‘인수대비’(2012년),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 여인 기승냥(하지원)의 사랑과 투쟁을 다룬 MBC ‘기황후’(2013~2014년) 등 별로 많지 않다.

‘대장금’과 ‘동이’는 여성이 주인공이지만 퓨전사극이다. 그나마 여성들이 나오는 사극들은 시기와 질투, 음모를 강조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여자의 적은 여자’가 여성사극이었다.

‘원경’은 그들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매우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관점을 취하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프런티어’다. 최근 ‘옥씨부인전’은 조선의 가상사극이지만, 구덕과 옥태영 1인 2역을 한 여주인공(임지연)은 조선시대의 가장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로 남을 것이다.

‘원경’은 이런 분위기의 흐름에서 제작된 사극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소헌왕후’ ‘문정왕후’ 등 여성들을 제목으로 내세워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진취적인 ‘걸크러시’를 보여주려는 사극들이 잇따라 제작될 전망이다.

원경

태종 이방원이 아닌 원경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내명부의 수장에 그치지 않고,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많아지고 상상과 창조, 해석의 여지도 다양해진다. 또, 원경을 세종대왕의 어머니라고 보면 또 다른 관점이 나타날 수 있다. 원경은 이방원을 도와 왕을 만들어내고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원경은 왕과의 情事도 주도적이었다…19禁

심지어 19금(禁)을 달고있는 OTT(티빙) 초반에 나온 파격적인 정사(情事)장면도 이방원보다 원경이 더욱 주도적임을 알 수 있게 했다.왕과의 합궁은 쾌락이 아닌, 왕자 생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궁중법도다. 관계중에는 옥체를 만져서도 안된다.

“왕실의 합궁의 목적은 오로지 생산에 있사옵고, 만에 하나 중전마마께옵서 주상전하의 복 위에 있는 망극한 일은 절대 아니 되오며, 절대 쾌락으로 즐기시면 아니되옵니다.”

숙직상궁이 민망하게도 왕과 중전이 성관계를 갖는 방 앞에 앉아 이렇게 외치지만 중전 민씨는 이미 이 법도를 어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임금이라 해도 원경에게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아닌, 부부의 관계로서의 욕망추구권을 가지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왕과의 성관계를 리드하는 중전이라니, 대단하지 아니한가.

아들이자 왕세자인 양녕을 결혼시키는 것도 원경이 주도했다. 방원의 측근 이숙번(안성군)은 방원과 독대 하면서 딸을 며느리로 바치겠다고 충성을 약속했다. 방원도 자신의 병권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던 이숙번이 필요했다.

하지만 원경은 이숙번의 딸과 김한로의 딸을 무명실로 베를 짜게 하는 경합을 벌여, 부정행위를 해서 더 좋은 결과물을 제출한 이숙번의 딸을 버리고 김한로의 딸로 결정했다. 방원은 이숙번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싶었지만, 원경은 세자빈 간택은 중궁에서 하는 일이라는 원칙을 십분 활용했다.

당시 광산김씨 김한로의 비리가 소문으로 돌아다녔는데, 원경은 “부족한 아비 때문에 (세자빈 경합)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 나라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여 명대사로 만들었다. 대인배가 아닐 수 없다. 차주영이 가뜩이나 큰 눈을 부릅뜨니 더 크게 보이면서 이 대사에 힘이 실렸다.

태종과 원경

▶원경은 연애 시절부터 주도적, 약혼자 고려왕족과 파혼하고 방원 선택

원경이 얼마나 주도적인 인물인지는 이방원과 연애시절에서 잘 그려진다. 당시 결혼은 집안 대 집안 일이다. 하지만 원경은 스스로 남자를 선택한다. 원경은 사랑과 꿈을 스스로 선택했고, 그 선택을 끝까지 감당하고 책임진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실제와 달리 상상하고 창조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원경’은 역사의 중요한 흐름을 실제 역사와 함께 하는 정통사극이지만, 원경이 천하를 품기 전, 같은 꿈을 품었던 원경과 이방원의 운명 같은 첫 만남을 그린 연모지정 로맨스인 프리퀄 ‘원경: 단오의 인연’ 2부작은 작가의 상상이 적지 않다. 방원과 원경이 혼담이 오고가는 연애시절 자료가 있을 리가 없다.

“난 개경의 귀족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요. 왕가와 결혼 안한다는 그대의 가문에 비하면…”(방원)

“도련님! 봄을 알리고 지고마는 봄꽃보다 조금 늦더라도 온통 봄을 차지하는 초록이 전 더 좋습니다.”(원경)

연애하다가 여성이 이런 말을 하면 데이트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사뭇 긴장할 것 같다. 원경의 주체적인 성격은 ‘원경: 단오의 인연’을 보면 더욱 잘 드러난다.

원경은 아버지가 고려 재상지종(宰相之宗) 15개 가문 중 하나로 고려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여흥민씨의 최고 어른인 민제다. 반면, 방원의 아버지인 이성계는 고려말 동북면 국경지대에서 병사들을 거느리는 무인 계급이다. 집안으로 보면 두 사람은 결혼할 상대가 아니다.

민제는 방원 집안은 자신보다 못하지만, 딸이 방원을 좋아하는데다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사위의 총명함을 보고 사위로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원경과 방원이 결혼한 시기는 고려 우왕 8년(1382년)이다. 민씨(원경)는 18세의 나이로 두살 연하남 방원과 혼례를 올렸다. 이 해는 방원이 과거를 통과해 성균관 유생이 된 해다. 방원은 이성계의 정비인 신의황후 한씨와 계비인 신덕황후 강씨와의 사이에 낳은 11명의 자식(아들 8명, 딸 3명)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케이스여서 처음에는 이성계가 방원을 유독 좋아했다.

태종과 원경

‘원경: 단오의 인연’에 따르면, 원경에겐 그 이전에 고려 왕족 영현군(왕익)과 혼인이 예정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현군이 원나라에 고려의 공녀를 보내는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고, 원경의 친구가 공녀로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경은 친구를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방원은 그런 원경을 대신해 소를 올리며, 원경에겐 그 불이익을 혼자 감당하겠다고 말했다. “불의를 보면 앞뒤 가리지 않는 여인이 궁금했다. 다음은 친구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그 무모함을 지켜주고 싶었다”는 게 상소의 이유였다.

원경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방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원경은 “황야에 홀로 서게 하지 않겠다, 함께 서겠다”라고 약조하며 영현군과의 혼인 약속을 깨고 이방원을 선택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이런 결정은 집안에서 내쳐질 각오를 하고 해야 한다. 그 정도로 원경은 주체적이고 과감했다.

‘원경: 단오의 인연’이 공개되자, 드라마 관련 SNS와 커뮤니티에는 “방원경(이방원+원경) 서사 좀 더 만들어주세요”라는 시청 댓글이 줄을 잇기도 했다.

단오날 벌어진 씨름판 에피소드는 시청자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방원이 상대의 반칙 기술에 계속 패하자, 원경이 코칭 스태프로 나섰다. 원경은 방원에게 “호미거리를 할 땐 그렇게 정강이를 죽어라 차는 게 아니라, 상대의 발목 뒷부분에 거는 것이다”라면서 “왜 지는지조차 모르면서 어찌 싸움을 하시오?”라며 기술을 거는 요령을 알려주면서 관심을 보였다.

방원은 원경에게 자신의 이름을 아냐고 묻자 원경이 “이방원 유생”이라고 답하는 순간 이방원의 얼굴엔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났다.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고려말은 혼란과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권문세족들이 당파를 이뤄 나라의 정치를 좌우했다. 그들은 원나라 세력들과 결탁해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수탈을 일삼으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다. 고려 왕은 각 절제사들이 가진 병사와 병기를 몰수했다.

이 때 원경은 방원에게 은밀하게 비밀통로에다 준비한 병장기들을 보여주면서 “때가 되면 서방님이 쓰셔야 할 힘”이라고 말한다. 이방원은 원경이 항상 자신보다 두어 걸음 앞서 있는 것 같음을 느꼈다. 그런 방원에게 원경은 “이것이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고백했다. 이 정도라면 이방원과 그의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건국에는 원경의 지분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원경이라는 존재가 방원에게는 든든한 내조로 작용할 것이다. 단순히 방원의 곁을 지키며 묵묵히 내조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를 향한 그의 싸움에 동참하고 그 고통을 함께 짊어지겠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원경식(式) 사랑은 거대한 역사를 주도적으로 만든 발판이 됐다.

두 사람이 정자에서 차를 마시고 휴식을 취하는 순간에도 원경은 방원에게 어떤 군왕이 될 것인가를 질문하며 ‘왕도정치’에 대해 말하는 맹자의 ‘제선왕문답’ 책을 내놓는다. 원경은 오랫동안 필사해온 ‘대학연의’도 세종이 되는 아들 충녕에게 주었다. 백성을 으뜸으로 두는 왕, 백성을 두려워하는 임금의 실체가 잘 녹아져 있다. 그러니까 남편 방원에게 정치 노하우와 방향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들 충녕이 군왕의 기본을 잡는 데 있어서도 원경은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

‘왕자의 난’때 어린 동생들을 죽여 내적 갈등과 압박에 시달렸고, 급기야 아버지 이성계(이성민)에게도 내쳐진 남편 이방원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늘 밤 역사는 분명 우리의 편입니다”라고 감싸 안으며, 그가 용상에 오르기까지 그 곁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도 원경이었다.

태종과 원경

▶이에 맞서는 이방원의 ‘후궁정치’, 원경왕후를 근본적으로 흔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방원이 조선의 3대 국왕이 된 이후 부부 사이는 균열이 시작됐다. 수직적 관계를 원하는 방원과, 때로는 수평적 관계도 필요하다는 원경. 갈등은 불가피했다.

권력 독점욕이 강했던 방원은 일단 권력을 완전히 잡은 후에는 중전뿐만 아니라 처가 식구들이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됐다. 원래 권력은 잘 나눠지지가 않는 법.

방원은 결국 1차 왕자의 난때 자신을 도운 민무구(여강군), 민무질(여성군)과 민무휼(여원군), 민무회(여산군) 등 처남 4명을 죽여버렸다. 무구-무질은 부친 민제 사망 2년후인 1410년 사약을 받았고, 무휼-무회는 그 6년후에 사사됐다.

장인인 민제가 병으로 사망해 상이 끝나자, 아들 4명이 모두 사위 손에 죽는 참극이 벌어졌다. 원경은 자신의 친정이 쑥대밭이 되는 걸 그대로 목격해야 했다.

이에 앞서 방원의 측근인 이숙번(박용우)이 이방원에게 이렇게 제언했다.

“주상은 권신의 힘을 빼야 백성이 중심인 조선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근데 권신의 중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중전마마와 중전 일가가 있지 않습니까? 중궁(원경왕후)을 견제하는 데는 힘 있는 후궁만한 게 없습니다.”

처가인 여흥민씨 식구들은 돈과 정보를 가진 자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돈과 정보에서 권력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겨 모든 기득권들을 잘라내고 새로 시작하고자 했던 태종의 후궁정치는 중전의 기를 누르고 처가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태종은 재위 18년간 후궁 18명. 한 해에 한 명씩 후궁을 맞이한 셈이다.

태종

태종의 후궁정치는 중전 민씨를 힘들게 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흔들지는 못했다.

태종은 침소에서 원경으로 부터 “이렇게 참담하게 될 줄 알았다면 집안을 동원해 당신을 왕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뛰쳐나가 원경의 최측근 나인이었던 채령(이이담)과 긴 밤을 보낸다. 태종은 “그대(원경)에게 치욕을 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했다”며 중전을 자극했다. 후궁 신빈 신씨를 의미하는 채령은 자녀도 함녕군 등 3남7녀를 낳았다.

하지만 원경은 방원이 후궁의 침소를 본격적으로 찾아다니는 기간에도 방원의 자식을 계속 낳아 부부금슬은 유지됐다. 민씨는 방원과 결혼한 이듬해에 정순공주를 낳고 남편이 정안군 시절 요절한 세 명의 아들 등 총 12명의 자식을 두었다. 자신의 남동생인 민무구와 민무질이 죽은 뒤에도 태종과 자식을 낳았다.

양녕이 원경의 장남으로 알려져있지만, 양녕을 낳기 이전에도 3명의 아들들을 낳아 모두 어려서 사망했다. 세종 아래로도 딸인 정선공주와, 두창으로 사망하는 아들인 성녕대군을 낳았다.

원경은 극중 승은을 입은 채령에게 “네 잘못이 아니다. 널 취한 사람의 잘못이다. 그런 잠자리라면 승은을 내려주셨다고 해서 기뻐할 일이 아니다. 널 업신여겼다. 노여워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한다. 왕조국가에서 이렇게 제대로 박힌 성인지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니.

태종

▶원경왕후에게 현재 원하는 주체적 여성상을 투영

드라마 ‘원경’은 원경왕후의 주체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현재성’을 가진 캐릭터가 됐다. 사료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도적인 삶을 사는 여성상을 원경왕후에 투영해 재해석을 하려는 제작진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태종 2년, 1402년 대궐 앞에 민의 상달을 위한 직소(直訴) 기구로 신문고를 설치한다. 극중에서는 원경이 신문고를 이용해 종친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백성들의 억울하고 고단한 현실을 풀어줬다. 원경은 관리들의 부정부패, 구휼미를 받지 못한 백성들의 억울함, 회암사에 전해지지 않은 전답 문제를 해결했다. 이제 보릿고개에도 굶어 죽는 백성도, 탐관오리에게 곡식이나 재물을 빼앗기는 백성도 없었다.

원경이 세자빈 간택에서 이숙번의 딸을 제외시키자 방원은 중전에게 “대놓고 군왕을 능멸한 것 아닌가요?”라고 묻는다. 이어 “중전은 군왕이 아니요”라고 하자, 원경은 “전하는 비겁하십니다. 여성군(민무질) 칼 뒤에 숨는 그 비겁한 모습이 어찌 조선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까?”라고 응수한다. 방원이 원경의 사적인 정보원 판수를 칼로 죽이자 “미치셨습니까?”라고 따진다. “아무런 죄없는 백성을 어찌…” 그 대사를 말로 하는 차주영 배우가 썩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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