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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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
열차 창밖으로 시베리아 벌판을 연상하는 설원과 활짝 핀 눈꽃들이 지나간다. 모레면 삼월이건만 아직 봄이 오는 걸 시샘하는 듯하다. 앙상한 가지 위에 걸린 눈꽃을 좋아해서 겨울 산행을 즐겨 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젠 추억의 시간이 되고 있어 아쉽다.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니 산 정상의 눈꽃을 상상하며, 원효대사를 비롯한 8명의 성인(聖人) 설화나, 왕건이 견훤에게 패해 8명의 측근 장수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간직한 팔공산(八公山, 1193m)을 향해 간다.
‘통일’을 거론하는 것이 요즘은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지만 팔공산은 ‘통일’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곳인 것만은 틀림없다. 김유신을 비롯한 화랑들의 수련처로서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이 됐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이념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래서였을까. 이곳에 한반도 통일을 기원하는 ‘세계 최대 통일약사대불’이 조성돼 있다. 지금은 남북통일을 말하기 전에 갈가리 분열된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는 것이 우선으로 보이는 현실이 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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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
1990년대 초 분단의 아픔을 해소하고 민족 대화합을 이루기 위해 조성된 ‘통일약사대불’이 25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1992년 11월 점안식을 가질 때 민자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참석해 한마음으로 통일을 염원했다. 비록 대선 기간이고 10만명이 넘는 불교 신도들이 모인 자리였기도 했지만 통일에 걸림돌이 되는 갈등을 치유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속히 이루고자 하는 뜻만은 보수와 진보, 여야를 떠나 한마음이었다.
대구 동화사는 임진왜란 때 의승장(義僧將)이었던 사명대사와 밀접하다. 승가대학생 9명이 대구 남문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던 1919년 3·1운동 시기엔 이들이 결의했던 장소가 동화사의 현재 스님들의 주거 공간으로 쓰이는 ‘심검당’이라고 한다.
반면, 당시 동화사 주지는 조선총독부에 비슬산 대견사를 없애자고 청원하는 등 친일에 적극 앞장선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일제 치하 그리고 광복 후 불교계의 항일운동과 왜색불교 척결 운동 사례들은 많지만, 광복 80주년을 맞는 3·1절을 앞두고 동화사 승려들의 만세운동을 새삼스레 돌아보게 된다.
‘통일약사대불’이 랜드마크인 동화사는 대사찰 이미지가 있다. ‘대불’이 있어서 일까. 대구·경북의 유일한 ‘총림’이어서만은 아니다. 불교 신자가 많은 영남 지방의 중심이자 보수정당의 심장부라는 대구 지역의 중심 사찰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일 것이다. 분열로 점철된 우리 사회 갈등을 치유하는 데 불교(종교)가 앞장서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이때, 영남권 중심 사찰의 역할을 기대해 보며 동화사로 자연스레 발걸음이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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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법화보궁.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
신라 말기 사회적 혼란기에 궁핍한 백성들의 열망이 담긴 약사여래불은 국가나 개인이 갖는 현실 세계의 어려움을 모두 구제해 주는 만병통치 위력을 가진 부처였다. 그래서 팔공산에는 약사여래불이 유달리 많았고 ‘통일 대불’도 약사불로 조성됐다. 봉황의 산세를 닮았다고 하는 팔공산에는 동화사 외에도 초조대장경이 봉안된 부인사, 조계종 10교구 본사인 은해사, 조선 영조의 원당이 됐던 파계사, 전국적인 기도처로 명성을 얻고 있는 갓바위, 5층 전탑이 유명한 송림사 등 영남불교의 요람이라 칭할 정도로 천년고찰과 암자들이 많다.
유가사(瑜伽寺)란 이름으로 창건된 팔공산 동화사는 통일신라시대 832년 심지조사(心地祖師)가 중창할 때 겨울인데도 오동나무꽃이 상서롭게 피어있어 오동나무 ‘동(桐)’, 빛날 ‘화(華)’의 동화사(桐華寺)로 바뀌었다. ‘오동나무꽃이 아름다운 절’이라는데 오동나무를 보지 못하고 왔다. 동화사는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선원, 강원, 율원을 모두 갖춘 조계종 7대 총림 중 하나인 ‘팔공총림’이며 제9교구 본사이다. 팔공산 일대의 사찰에서 ‘심지왕사’로 받들고 있는 ‘심지(心地) 스님’은 신라 말기 헌덕왕의 아들인 왕자 신분으로 출가했다.
신라시대 법상종(法相宗)의 개조로 알려진 진표(眞表) 율사의 법제자인 영심(永深) 스님으로부터 미륵보살 수계의 징표인 점찰 간자(簡子, 점을 치는 대쪽)를 전해 받아 봉안할 곳을 찾으러 다녔다. 팔공산에서 간자를 던지자 날아가 숲속 우물가에 떨어졌고 그곳에 법당을 세운 것이 동화사라고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다. 동화사에서 작은 개울 하나 건너에 있는 현재 선방인 ‘금당선원’ 자리라고 한다.
동화사는 고려시대엔 불교 경율(經律) 시험을 치르는 사찰로 지정됐고 조계종의 개조(開祖)인 보조국사와 홍진국사, 그리고 1606년 사명대사가 중창했다. 1732년 영조 때 대웅전, 천태각, 영산전, 봉서루, 심검당 등이 중창됐다. 사명대사는 동화사에서 수행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남 승군의 사령부인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을 설치하고 영남도총섭(嶺南都總攝)이 돼, 전국의 승병을 총괄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현재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되새겨 추모 다례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사명당 진영 중 가장 빼어나다는 진영(보물)과 현존하는 보조국사 진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라는 진영(보물)이 동화사에 있다.
해방 이후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진영이 봉안돼 있고 효봉 대종사를 비롯해 성철 등 불교 정화의 주체가 된 많은 승려가 동화사에서 결사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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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체험관 및 교육관 공사 안내판 |
일주문인 동화문을 지나면 주차장 좌우로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사명대사 얼이 살아 숨 쉬는 수장고’와 ‘사명대사 체험관 및 교육관’ 공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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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안내 돌 표지석 하단에 ‘팔공총림 방장 의현’이 새겨져 있다. |
공사를 안내하는 돌 표지석 하단엔 ‘팔공총림 방장 의현’이 새겨져 있다. 통일 대불 옆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법당이 있는 ‘법화보궁’ 내 ‘선’ 체험관은 현재 방장 의현 대종사의 행적 홍보관처럼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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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문(일주문) |
동대구역에서 30여분, 대구공항에서 차로 20여분 가면 동화사 옛 일주문 봉황문 매표소를 먼저 만나고 조금 더 가면 팔공산 케이블카를 타는 관광단지와 동화사 갈림길을 접한다. 갈림길을 지나면 동화사의 새로운 일주문 ‘동화문’을 마주하는데 들어가는 길이 두 개라 절이 분산된 느낌마저 들어 대찰임에도 풍모가 덜하다. 오래전에 방문했던 기억과도 사뭇 다른 느낌이다.
633년에 최초로 건립돼 1965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한 봉황문(보물)은 흔히 옛길로 부르는 길에 있는 일주문이다. 현재는 새로운 큰길에 버스도 통과할 정도로 큰 동화문이 새로 생겨서 왕래가 뜸하지만 계곡 길을 걷는 운치를 얻고자 한다면 이 길이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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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좌상 |
봉황문 바로 앞에는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암벽에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모습의 ‘마애여래좌상’(보물)이 푸근한 얼굴과 비교적 풍만한 모습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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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좌상 |
통일신라 후기 작품이라서인지 많이 마모돼 있다.
봉황문에서 얼어있는 계곡 물길을 따라 10여분 걷다 보면 아찔한 느낌이 드는 108계단을 만나게 되고 계단을 오르면 옆면에 ‘금강계단(金剛戒檀)’ 현판이 붙은 ‘통일기원대전’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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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기원대전 |
통일대불 맞은편에 있는 전각으로 안에서 유리를 통해 바로 ‘통일대불’을 마주할 수 있다. 힘들게 108계단을 오르면 아찔한 희열도 느낄 수 있겠지만, 계곡 길을 좀 더 올라가 옹호문 쪽에서 내려오는 길과 마주하는 평지 길을 통하면 쉽게 통일대불 앞마당으로 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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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약사대불(왼쪽)과 삼층석탑 |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지원 아래 조성된 석조 통일대불은 대불 17m, 좌대 13m, 참배단 3m로 총 33m 높이에 최대 둘레가 16.5m라서 그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 대불 앞마당 두 삼층석탑 높이도 17m이고, 두 석등 역시 7.6m에 달한다.
전북 익산에서 석공 108명이 7개월 동안 황등석을 불상에 2000톤, 좌대에 3000톤을 들여 만들어 동화사로 옮겼다고 한다. 병풍석, 석탑, 석등을 합하면 원석이 1만5000톤 이상 소요된 ‘세계 최대 통일약사대불’은 대통령을 꿈꿨던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많은 시주를 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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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호문 |
동화문을 지나면 주차장 아래편엔 율원(율학 승가대학원)으로 사용하는 비로전이 있고 주차장을 조금 넘으면 곧바로 사천왕상을 모셔둔 옹호문(擁護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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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전 |
‘비로전’은 통일신라시대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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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광전 |
그 옆에는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며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하나임을 보여주는 ‘비로자나불’이 있는 ‘대적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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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비로자나불좌상 |
1.29m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은 9세기 작품이라는데 원형 보존이 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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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전 앞마당의 3층 석탑 |
앞마당에 단정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보물)에선 1967년 해체 보수 과정에서 뚜껑도 사라지고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사리 항아리(보물)가 발견됐다. 여기에 민애왕의 행적이 꼼꼼히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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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루 |
옹호문 바로 정면에 ‘봉황의 기운이 서린 누각’이라는 뜻의 봉서루(鳳棲樓)가 동화사의 누문(樓門) 역할을 하고 있다. 대웅전을 가려면 누각을 지나가야 하며 유리로 문을 해 큰 법회 시 봉서루에서도 대웅전 법회에 동참할 수 있게 했다. 누각 계단 아래 석불상 밑의 세 개의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는데, 팔공산은 봉황의 모습으로 대구를 감싸 안고 있으며 동화사는 봉황의 아기궁 자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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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루 뒤편에 걸린 ‘영남치영아문’ 현판 |
봉서루 뒤편에는 ‘영남치영아문’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휘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현판이다.
봉서루 아래층과 대웅전 앞마당에는 석가탄신일 연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조선 후기인 영조 시대에 지은 것이라 하며 내부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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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
대웅전 뒤뜰은 기가 좋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있어 주민들이 복을 비는 곳이라고 해, 가보니 너른 동산이 있으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6·25전쟁 당시, 동화사 대웅전 뒤뜰에 금괴 40㎏이 묻혀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나타나서 발굴 직전까지 갔으나, 허튼 주장으로 문화재를 훼손할 수 없다고 해 없던 일로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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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간 앞 개울 건너 바위에 새겨진 ‘팔공산 동화사적비’ |
공양간 앞, 개울을 건너면 바위에 ‘팔공산 동화사적비’가 새겨져 있고 언덕 위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보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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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동화사적비 |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하는데, 견실하고 장중한 느낌이지만 생각보다 작았다.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절 입구에 있음을 고려할 때 보물이 집중된 ‘극락전’ 일원이 초기 동화사였겠다고 추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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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선원 |
승려들이 참선 수행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금당선원’ 옆에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인 극락전(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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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제전 |
뒤쪽에는 또 다른 아미타불을 모신 수마제전(須摩提殿, 보물)이 있다. 극락전이 두 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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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양 옆에 2기의 석탑은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으로 불린다. |
극락전 양 옆에 2기의 석탑이 있는데, 모두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탑이다.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보물)이라 불리며 서탑은 해체복원 과정에 조그만 탑 99개와 사리를 담아두는 장치가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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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왼쪽이 서탑, 오른쪽이 동탑. |
극락전을 벗어나면 대구 도학동에 쓰러져있던 것을 옮겨 온,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8각 모습의 ‘대구 도학동 승탑(僧塔)’(보물)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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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도학동 승탑 |
대웅전 뒤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채에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좌우로 열좌한 ‘영산전’이 있는데, 건물 외벽 상단에 시념인(時念人) 글씨와 함께 씨름하는 스님 벽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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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전 내 씨름하는 스님 벽화 |
조선 초기까지 팔공산 일대에선 산지 사찰끼리 필요 물품을 교환하던 승시(僧市)라는 승려들의 시장이 열렸고 이때 ‘승려 씨름대회’도 있었다고 한다. 동화사는 전통 계승 및 불교문화의 대중화를 위해 ‘팔공산 승시축제’를 2010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동화사 주지스님배 씨름대회’도 함께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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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대불 앞 ‘국운융창 국태민안’ 현수막 |
볼 것 많고 생각할 것 많은 동화사의 통일 대불 앞에 놓인 ‘국운융창 국태민안’ 글이 잔영처럼 남아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수양대군의 오른팔로 활동했던 서거정(徐居正)이 고향인 대구의 10경을 읊으면서 동화사 가는 길을 동사심승(桐寺尋僧)이라는 한시로 남겼다.
“저 멀리 절에 이르는 돌계단 길을 따라 오르니
푸른 행전에 흰 버선과 검은 등나무 지팡이
지금의 즐거움을 아는 이 없네
즐거움은 승려가 아니라 청산에 있다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