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한시 만난 궁중악 ‘보허자’ 더 웅장해지다

3월 13~14일 국립국악원 ‘행악과 보허자’
AI, 효명세자·정약용 등 한시 학습 후 작시


국립국악원 ‘행악과 보허자-하늘과 땅의 걸음’ [국립국악원 제공]


“상망기차원 제단봉헌지영속 왕은달어태평성세(相望祈此願 祭壇奉獻志永續 王恩達於太平盛世·서로 바로 보며 이를 기원하리라. 제단에 올리는 정성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왕의 은혜는 태평성세에 달리리라).”(‘보허자’ 3장 중)

‘인공지능(AI) 문장가’가 태어났다.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세자(1809~1830)의 한시 350편. 정약용과 김정희의 한시 100여 편을 학습한 AI가 이제는 누구도 쉽게 쓰지 않는 한시를 지었다. 선율만 남고 창사(唱詞·노랫말)는 없었던 ‘보허자’ 3장을 복원하기 위해서다.

이건회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은 다음달 13~14일 정악원의 정기공연 ‘행악과 보허자-하늘과 땅의 걸음’을 앞두고 지난 25일 기자들과 만나 “우리 시대에 맞는 정악의 외형적 확장을 위해 AI를 활용했다”고 말했다.

‘허공을 걷는 자’라는 의미의 보허자(步虛子)는 주로 왕이 행차를 마치고 돌아온 뒤 베푸는 잔치에서 연주된 궁중 연례악의 하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무병장수와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연주됐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송나라 음악이 고려시대에 들어와 발전, 신선들이 높은 직위의 상선을 알현하며 그의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모습에서 유래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AI를 활용해 ‘보허자’의 3장을 복원했다. 총 세 악장으로 구성된 ‘보허자’는 1·2장만 가사가 남아있다. AI로 창사 작업을 한 박진형 아트플랫폼 유연 대표는 “1·2장의 가사와 3장에 나올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해 효명세자의 한시를 학습한 라마3 모델에 입력, 이를 토대로 한글 가사를 생성한 뒤 챗GPT를 통해 한자시를 만드는 방식으로 창사를 제작했다”며 “주제는 2장의 가사 내용을 참고해 왕의 장수와 백성의 태평성대, 나라의 영속으로 선정해 3장의 내용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창작된 가사를 70여 명의 가객이 부르며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다.

국립국악관은 앞서 지난해에도 악보로만 전해진 ‘치화평’ ‘취풍형’의 선율을 AI로 복원, 사라진 전통을 최신의 기술로 되살려왔다. 이건회 감독은 “궁중음악이 과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최신 기술과의 접목으로 이 시대의 관객과 나누고 호흡할 수 있는 더 좋은 정악 레퍼토리를 만들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행악은 왕실이 행차하거나 관찰사, 사신 등의 행렬에서 연주한 곡을 말한다. 국립국악원이 행악을 주제로 공연하는 것은 2016년 이후 9년 만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왕이 궁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과정에 따라 곡을 구성했다. ▷궁을 나설 때 연주하는 ‘출궁악’(여민락만) ▷행차 중 연주하는 ‘행악’(취타·대취타) ▷궁으로 돌아올 때의 ‘환궁악’(여민락령) ▷환궁 이후 베푸는 연향에서의 ‘연례악’(보허자) 순서로 이어진다.

행악에서 선보일 ‘취타’와 ‘대취타’는 본래 관악기 위주로 편성되나, 이번 공연에선 ‘취타’에 향비파, 월금 등의 현악기를 추가했다. 정악단의 고보석 거문고 수석과 이명하 가야금 수석이 현악기를 구성했다. 대취타에는 작은 징들을 나무틀에 매달아 연주하는 악기인 운라를 편성했다.

각각의 곡들이 매끄럽게 연결하기 위해 공연엔 무용단이 함께한다. 왕의 역할을 한 무용수가 무대에 올라 행차 과정을 시각적으로 연출한다. 고승희 기자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