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피에르 위그의 ‘예술 실험’

리움미술관 ‘올해 첫 선택’ 피에르 위그
주목받는 佛작가 亞 첫 개인전 ‘리미널’
AI·원숭이·암세포 통해 ‘인간다움’ 질문


피에르 위그 ‘리미널’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제공]


사막 위 인간 유해에 대해 알 수 없는 의식을 수행하는 기계들의 모습을 표현한 ‘카마타’(2024~진행 중) [리움미술관 제공]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전시장. 첫발을 들이자, 습기를 머금은 듯한 공기가 코끝을 감싼다. 이내 출산 앞둔 임산부 배를 본뜬 현무암 조각인 ‘에스텔라리움(Estellarium)’이 희미하게 반짝인다. 뱃속의 태아가 성장하는 과정을 생이 확장되는 별(stellar)의 무한한 공간에 빗댔다. 그렇게 생명과 우주를 잇는 경계 너머로 발을 들이며, 관람객은 알 수 없는 세계 속으로 빨려든다.

고개를 돌리자, 얼굴 형상이 지워진 나체의 여성이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방황한다. 세계도, 뇌도, 얼굴도 없이, 공허한 공간을 부유하는 불안한 몸짓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움직임은 센서로 전시 공간에서 받는 정보를 수집해 만든 결과물이다. 이어 또 다른 영상 화면에서 ‘대재앙’ 수준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버려진 식당에 살아남은 실제 원숭이가 등장한다. 어린 소녀의 가면과 가발을 쓴 채 인간에게 배운 동작을 인형처럼 반복하는 원숭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기괴하다.

작품 속 존재들이 인간 외피만을 두른 껍데기라는 의심이 스며든다. 고정된 정체성이 흐려지고, 익숙한 존재가 낯설게 변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정말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가. 여러 질문이 피어오를 무렵, 무의식 속에 갇혔던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프랑스 현대미술가 피에르 위그(63)의 아시아 첫 개인전 ‘리미널(Liminal)’이 27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개막했다. 리움미술관이 제작 지원한 ‘리미널’ ‘이디엄(Idiom)’ ‘카마타’ 신작과 함께 지난해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때 푼타 델라 도가나 미술관에서 선보인 그의 주요 작품 상당수가 한국에 왔다.

전시 제목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뜻한다. 다만 그가 말하는 리미널은 단순한 전환기가 아니라,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존재가 출현하는 순간에 가깝다. 위그의 작업에서 소위 ‘리미널’한 존재들은 자율적인 시스템 안에서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그 자체로 변화하고 진화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어서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런 위그의 예술세계가 드러난다. 인공지능(AI)이 학습한 패턴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상과 주변 환경의 온·습도 등에 실시간 반응하는 소리 등이 작품에 반영돼 예술의 개념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낸다.

처음 공개된 ‘이디엄’이 대표적이다. 황금빛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전시장을 다니는데, 마스크에 달린 센서가 주변 환경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해 의미를 알 수 없는 생성형 언어를 만들어 소리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이 내는 불가사의한 소리가 의미를 구별하는 음의 최소 단위에서 단어와 구문으로 확장된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증식하고 분열하는 암세포에 따라 이미지가 시시각각 편집되는 ‘U움벨트-안리’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생명의 가능성과 한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작품 구성을 위해 삼성서울병원의 연구용 암세포가 쓰였다.

마지막에 다다르면 건조한 사막에서 인간의 유해를 두고 장례를 치르는 듯한 신비로운 의식을 수행하는 기계들이 등장한다.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우연히 발견된 인간 해골에서 시작된 영상 작품으로, 화면 속 기계들은 기계학습으로 구동된다. 인간 지능을 흉내내며 진화한 기계들이 인간의 죽음 이후를 자신들만의 의식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은 AI가 실시간으로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편집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영구적으로 펼쳐진다.

이처럼 작가는 관람객이 시각·청각·후각으로 감각하는 작품들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래서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또 다른 존재들이 출현하는 순간을 집착하듯 포착한 작가의 실험실 같은 전시장은 오히려 인간인 우리가 익히 느끼는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통로가 된다. 프리뷰 전시에 나오지 않은 작가는 서면으로 “내 작업은 인간존재론에 대한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이고, 그 원형에 대한 탐구다. 나는 이야기의 형태가 선형성을 벗어날 때 흥미를 느낀다”며 “시뮬레이션은 혼돈을 지날 수 있게 해 주는 여러 가능성의 투영”이라고 했다.

위그의 작품들은 단일한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발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는 관람객에게 달려 있다.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인간 개념과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현실, 인간 이후와 인간 바깥의 세계를 탐구한 작가의 상상이 감각적으로, 그리고 시적으로 전환된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7월 6일까지 열린다.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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