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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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김판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린 소멸하거나, 흔적을 남기거나, 존재 자체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하죠.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안무가 김판선이 돌아왔다. 무려 6년 만이다. 그가 공연계에 이름 석 자와 얼굴을 알린 것은 2006년이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모던 발레 무대에 스페인의 나초 두아토, 이스라엘의 오하드 나하링과 같은 세계적인 안무가와 함께 초청됐다. 안무가이면서 무용수인 그의 몸짓은 그가 만들어내는 ‘몸의 언어’만큼이나 강력하고 매력적이다. 군더더기 없이 이어지는 움직임과 단단한 힘으로 무대를 장악했던 20대 스타 무용수는 20년의 시간을 쌓으며 밀도 높은 오늘을 펼쳐내고 있다.
그가 이끌고 있는 언노운피에스(UNKNOWNPS)의 신작 ‘타임 이즈 스페이스, 스페이스 이즈 타임’(3월 2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이다. 제17회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작품이다. 최근 전화로 만난 김판선 안무가는 “몸이라는 본질적 매체를 통해 시공간 속의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무대”라고 말했다.
작품의 영감이 된 것은 갤러리의 한 전시였다. 김판선에겐 보고 듣고 느낀 일상의 모든 순간이 영감이 된다. 그는 “전시장에서 몇 백 년, 몇 천 년 전의 조각과 그림을 마주할 때 다양한 감정이 일었다”며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남겨진 존재의 의미를 현시점에서 바라보며 만약 이렇게 남겨진 흔적과 기억과 인물, 이 모든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면 어떨까, 그 느낌을 곱씹어봤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어떤 흔적과 기억을 남길 수 있을까”. 이 작품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 무대는 김판선 자신이자, 우리 모두의 삶을 담아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비주얼부터 스토리텔링까지 일관성 있는 구성으로 작품의 주제를 담아내고자 했다.
1장에선 현재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 바라보는 과거 어느 시점의 사람, 혹은 사물, 혹은 의식을 다룬다. 김판선은 “특정 인물의 드라마틱하고 역사적인 느낌이 구현될 것”이라고 했다. 2장에선 1장의 캐릭터를 유지하되 비중을 덜어내고, ‘특정한’ 한 사람의 인생을 ‘모두의 인생’으로 치환한다. 하나의 인생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며 계속된다는 ‘순환’의 의미도 담는다.
그는 “(작품에서) 시간은 단선적 흐름이 아니라 파편화된 형태로 존재한다”며 “과거, 현재, 미래가 얽혀 재구성되고, 기억과 경험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며 지속된다는 이야기를 담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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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김판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삶이 ‘시간의 흐름’ 위를 거닐 때마다 그 안에서 마주하는 갖가지 좌절과 굴욕, 걱정과 불안, 비탄이 춤으로 담긴다. 그는 “다소 무거울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는 삶의 감정들이 중첩돼 우리 인생의 민낯을 드러낸다”고 했다. 김판선이 자신의 작품에 꾸준히 담아온 이야기다. 그는 전작 ‘두려움에 갇혀’(2019)에서도 매일을 살아가며 안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을 그려냈다.
그는 “내 인생에서 겪었거나 느꼈던 현상들을 작업물로 엮어보고 싶었다”며 “그간 모든 작품의 주제와 콘셉트가 제가 살면서 겪고 느끼고 상상해왔던 것을 담았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한 생명체로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살고 있지만, 어떻게 소멸되고 죽어갈지는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불안도 있었고요. 그 감정에 빗대 다른 감정들을 담아내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의 역사에서 시작한 무대는 사실 모두의 이야기다. 김판선은 “나의 히스토리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일반적인 삶에서 겪을 수 있는 현상”이라며 “이 감정을 통해 일상에서 느낀 존엄과 가치, 삶의 흐름에 대한 인식을 돌아볼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그의 무대는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도 그 안에 매몰되진 않는다. 김판선은 “두려움을 갖고 사는 한, 우리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고 말한다.
추상으로 쌓아올린 현대무용은 때때로 관객에겐 지나치게 불친절하다. 작품의 의미나 메시지를 알 수 없어 ‘난해하다’는 반응이 빠지지 않는다. 김판선은 그러나 “예술이 뚜렷하고 정확한 것만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 무언가를 알고 봐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저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지 느끼는 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 자체로 다양성일 뿐 아니라 최고의 감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거대한 추상의 세계 안에 무수히 많은 탐구와 오감을 통해 길어올린 고민이 담긴다. 그는 사유하는 예술가다. 정교한 몸의 언어를 빗기 위해 끝없는 사유의 시간을 거쳐 지난한 날들을 지나 목적지에 도달한다.
“몸의 언어를 다룬다는 것은 결국 정신을 다루는 거예요. 나의 정신과 의식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행위가 바로 몸의 언어인 거죠. 몸은 아무런 의미없이 움직이지 않아요. 지금 나의 의식이 명확하고 뚜렷해질 때야 몸으로 표현할 수 있죠. 정신과 육체가 자연스럽게 하나로서 표현될 때 더 명확한 몸의 언어를 만들 수 있어요.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할지, 어떤 작품을 올리지는 모르지만 더 고민하고 들여다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