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골든리트리버·카피바라가 주인공
말 한마디 없어도 이야기 전개돼 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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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의 라트비아 장편애니메이션 ‘플로우’가 올해 골든글로브상과 아카데미(오스카)상을 모두 휩쓸었다. |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북유럽에 있는 인구 187만명의 작은 나라 라트비아가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의 오스카상(장편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으로 들썩이고 있다. 긴츠 감독의 애니메이션 ‘플로우’가 라트비아 영화로는 사상 처음으로 오스카는 물론 골든글로브에 진출하자 마자 트로피를 안았으니 그야말로 잔치날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기생충’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만큼의 관심과 인기가 긴츠 감독에게 쏟아지는 상황이다.
전 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하기에는 사실 영어처럼 범용성 있는 언어로 작품을 만드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 이에 긴츠 감독은 라트비아의 공용어인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 대신 ‘언어’를 쓰지 않는 현명한 전략을 취했다. 덕분에 이 저예산 라트비아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상들을 두루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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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우’의 주인공 동물 중에서도 진 주인공 격인 ‘고양이’ |
‘플로우’는 검정고양이, 골든리트리버, 카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 등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고양이는 “야옹” 또는 하악질, 리트리버는 “월월” 짖거나 꼬리 풍차돌리기, 카피바라는 소리보단 그저 행동으로, 여우원숭이도 “끽끽”거리는게 다이고, 뱀잡이수리는 날개를 펼쳐보이거나 발톱으로 의사표시를 한다. 90분 여간 이어지는 이 영화에는 단 한 순간도 인간의 언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동물들에게도 라트비아 이름 또는 영어 이름조차 붙지 않는다. 고양이는 고양이고, 개는 개, 카피바라는 카피바라다. 동물들은 서로를 호명하지 않는다. 용무가 있으면 그저 곁으로 다가가거나 앞발로 툭 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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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의 앞에 자리잡은 ‘플로우’ 고양이 |
인간이 살았던 흔적만이 남아있는 세상, 홀로 집을 지키던 ‘고양이’는 들판을 쏘다니며 산책도 하고 먹잇감도 구한다. 하지만 작은 고양이에게 커다란 개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죽어라 도망을 쳐야한다. 공포심에 뒤로 한껏 쳐진 두 귀와 긴장감에 아래로 내려간 꼬리, 확장된 동공, 절박하게 뛰는 모습을 보고있자면 고양이가 안타깝고 가여워 탄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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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잡이수리가 보트의 키를 잡고 운전하고 명랑한 골든리트리버가 그 옆에서 웃고있다. |
개들을 따돌리고 숨을 돌리던 고양이는 다시 돌아오는 개들과 마주친다. 그런데 개들은 혼비백산해 도망가기 바쁘다. 뒤이어 사슴 떼가 포식자에게 쫓기듯 몰아친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순간, 멀리서부터 물이 차오른다. 급류에 휩쓸린 고양이는 정신을 차리고 ‘고양이 영법’으로 수면 위로 올라가 머리를 끄집어낸다. 겨우 육지로 기어올라 간 고양이는 집으로 달려간다. 필시 고양이를 사랑했을 주인이 만들어둔 고양이 목조 동상과 스케치들도 밀려드는 홍수에 하나씩 물에 잠긴다. 산꼭대기까지 피신했지만 물은 끝을 모르고 차오른다. 고양이가 여지없이 빠져죽겠구나 싶을 때 보트 한 척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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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플로우’의 동물친구들 |
보트 안의 유일한 승선객 카피바라는 고양이가 타든 말든 큰 반응이 없다. ‘아, 너 왔니?’하는 무심한 승낙의 눈빛을 한 번 주고는 이내 퍼질러 눕는다. 세상이 모두 물에 잠기고 망망대해에 고래가 헤엄친다. 보트는 흘러가다 아까 고양이를 뒤쫓던 개들 무리 중 하나인 골든리트리버를 태운다. ‘천사견’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골든리트리버는 아까도 친구들이 달리니 얼떨결에 따라 달린 것이었다.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면서 고양이에게 놀아달라 앙탈을 부리지만 거절당하곤 풀이 죽어 낑낑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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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물을 보물로 삼는 여우원숭이 |
오래된 사원의 꼭대기가 아직 물에 잠기지 않았다. 인간이 쓰던 집 열쇠들, 거울, 화병 등을 제 보물처럼 모아둔 여우원숭이 한 마리가 그곳에 남아있었다. 여우원숭이까지 구조해 태우고 보트는 순항한다. 그러다 바다가 거칠어지면서 배가 크게 흔들리고 고양이는 물에 빠진다. 뱀잡이수리가 물에 빠진 고양이를 발톱으로 낚아채 둥지로 올라간다.
잡아온 고양이를 공격하려는 다른 뱀잡이수리들에 맞서 한 암컷이 고양이를 보호하고 나선다. 대장 수리와 1 대 1로 붙어 대결을 펼치지만 암컷은 날개 한 쪽이 꺾여버리는 응징을 당하고 무리에서 낙오된다. 고양이는 생명의 은인과 함께 보트로 돌아간다. 세상을 뒤덮은 대홍수 속에서 한배를 탄 동물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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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가 뒤덮은 세상, 한배를 탄 동물들은 어떻게 될까 |
인간의 말로는 대사도, 지문도, 설명도 단 한 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각 동물의 고유한 몸짓 언어, 소리, 표정만으로 모든 상황과 각자의 마음과 의도가 온전히 이해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된다. 동물들에게 악의라고는 없다. 간혹 상대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일이 있어도 그건 그냥 그 동물의 본성에 맞게 행동한데서 촉발된, 어쩔수 없는 일이다. 순수한 동물들이 나오는 영화 ‘플로우’를 보는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짓거나 안타깝고 불쌍해서 입을 삐죽 내밀게 된다.
인간의 언어는 아름답게 쓰면 일생일대의 감동으로 남지만, 종종 공해가 되어 밀려온다. 요즈음 어린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애니메이션에 울고 웃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플로우’는 잠시 일상의 언어를 음소거하고 동물들의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는 탈출구가 될 수 있다.
플로우/ 감독 긴츠 질발로디스/ 3월 19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