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액션 그리고 멜로…류승완이 전하는 설 종합선물 세트 ‘휴민트’ [리뷰]

‘베를린’·‘모가디슈’ 이은 해외 로케 3부작
차갑고 황량한 블라디…세 남녀의 뜨거운 사투
작품 중심 잡는 조인성·절절한 멜로 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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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휴민트’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날 것의 액션이, 보고만 있어도 숨이 차오른다.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첩보물 특유의 박진감이 잠시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실컷 시린 눈밭에서 함께 사정없이 맞고 때리고 구르다 정신을 차려보면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차갑고 황량한 회색지대에서 벌어지는 첩보전, 그 안에 숨은 처절하고 진득한 멜로 때문이다.

류승완 감독이 돌아온다. 오는 11일 개봉하는 조인성·박정민·신세경 주연의 ‘휴민트’다. 영화는 ‘베를린’(2013), ‘모가디슈’(2023)를 이은 ‘류승완표’ 해외 로케이션 3부작의 마침표를 찍는다. ‘베를린’ 이후 류 감독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첩보물로, 몸을 사리지 않는 생생한 액션과 숨 막히는 대립·연대 속에 담은 진한 휴머니티가 있다. 류 감독의 잘하는 ‘장기’로 가득 찬 이 영화는 류승완식 첩보물을 기다린 관객들의 기대에 십분 부응한다.

‘휴민트’는 회색빛을 휘감은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이 격돌하는 이야기를 담은 액션 누아르다. 영화는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듯, 방 안에서 조용히 장비를 챙기는 조 과장(조인성 분)의 모습을 따라가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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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소속 조 과장은 북한산 마약 밀매 경로를 찾는 작전 중 자신의 휴민트(정보원)를 잃는다. 살기 위해 이용하는 이 바닥에 믿음은 없다. 인신매매로 팔려 다니며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정보원에게 탈출을 약속했던 그는 정보원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죽은 정보원이 생전 털어놨던 행적을 바탕으로 조 과장은 러시아와 북한의 조직적 인신매매를 감지한다. 국정원은 그 근원지로 의심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조 과장을 파견한다. 그곳에서 조 과장은 외화벌이하는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신세경 분)를 정보원으로 택한다.

그리고 5개월 후, 채선화의 옛 연인인 국가보위성 박건(박정민 분)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명목은 북한 총영사관 황치성(박해준 분)을 감시하기 위해서지만, 사실은 옛 연인을 찾아서다. 박건과 채선화의 관계와 박건이 진짜 러시아에 온 목적을 알아챈 황치성은 그의 목을 틀어쥐기 위해 선화의 뒤를 쫓는다. 선화는 행적이 드러나며 위기에 빠진다.

더 이상 정보원을 잃을 수 없는 조 과장, 그리고 또 한 번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박건. ‘휴민트’를 구하기 위한 두 남자의 불꽃 같은 사투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첩보물의 맛이 제대로다. 잔기교 없이 돌파하는 액션, MSG를 쏙 뺀 배우들의 연기, 더없이 황량한 블라디보스토크가 만들어내는 3박자가 절묘하다. 영화는 초반부터 조인성의 강도 높은 액션으로 문을 열어, 마지막까지도 타협 없는 액션 시퀀스로 장식한다. 첩보물의 공식 같은 속고 속이는 게임의 무게를 덜고, 그것을 각 캐릭터의 서사와 감정, 연결로 채우더니 결국에는 액션으로 발화시키는 솜씨가 놀랍다. 총기전, 육탄전, 도검전, 그리고 카체이싱까지. ‘액션 종합선물세트’란 수식이 부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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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는 앞선 류승완표 영화가 그랬듯 그 자체로 서사에 힘을 싣는다. 러시아와 북한의 국경이 만나는 회색지대. 국가의 보호가 느슨해진 이곳에서 해외 노동자와 브로커, 공관, 정보기관들이 나름의 목적으로 뒤엉킨다. 개인은 어디에도 제대로 소속되지 못한 채 방치된다.

‘인민의 영웅’마저 차가운 바다 밑에 수장돼 사라져 버리는 곳이 블라디보스토크다. 느슨한 국가 시스템은 누군가의 욕망을 끄집어내고, 또 누군가를 손쉽게 희생시킨다. 결국은 ‘누구를 믿느냐’가 생존과 직결되는 곳, 온기라고 없는 차가운 이 도시는 ‘노출된 휴민트를 구한다’는 영화의 로그라인과 더 없는 합을 이룬다.

캐릭터들은 국가의 공백 속에서 각자 믿고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쫓고 싸운다. 조 과장은 정보원을 잃는 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박건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일말의 고민 없이 몸을 던진다. 모두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이들이지만, 결국 이들이 나아가는 길 위에는 국가보다 개인의 신념이 앞선다. 나라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개인의 희생을 눈감는 국가보다, 이들의 대가 없는 희생에 더욱 고개가 끄덕여진다.

‘휴민트’의 진짜 매력은 모든 것이 이루는 강렬한 대비다. 생기 없이 무미건조한 블라디보스토크의 황량함은 세 주인공이 보여주는, 몸을 던지는 사투와 묵직하고 뜨거운 감정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인적조차 드문 무대는 쉽게 진실을 감춰주지 않는다. 속을 드러낼 수 없는 설정과 무대에서 캐릭터들은 철저히 절제된 표정과 몸짓, 대사로 감정을 폭발시킨다.

조인성은 류 감독과의 세 번째 호흡이 무색하지 않은 안정감 있는 액션과 연기로 완벽하게 영화의 중심을 잡는다. ‘타짜: 신의 손’(2014) 이후 12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한 신세경은 특유의 강단 있는 눈빛으로 연약해 보이지만 결코 부러지지 않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연기한다. 그리고 박정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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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인공은 조 과장 역의 조인성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박정민이다. 박건의 서사는 그와 선화의 과거에서부터 켜켜이 쌓여, 박건의 후회와 결심으로 이어지고, 결국 선화를 향한 그의 순애보로 마침표를 찍는다. 이 영화가 멀리서 보면 첩보 액션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절절한 멜로인 이유다. 오랜만에 옛 연인을 만나 그를 구하기 위해 사투하는 박건의 눈빛과 표정, 몸짓에선 말로 차마 표현하지 못한 마음들이 물씬 녹아난다. 지난해 영화, 뮤지컬, 뮤직비디오 등을 넘나들며 이젠 ‘대세 배우’가 된 박정민은,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또 한 번 증명한다.

‘휴민트’는 설 연휴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지난 4일 개봉한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 김태용 감독의 ‘넘버원’과의 3파전이다. 한국 영화의 ‘보릿고개’가 예고된 올해이지만, 명절 성수기를 앞둔 지금은 이들 영화 덕에 마음이 왠지 든든하다.

“사실 올해 설 연휴에 개봉하는 영화를 만드는 분들과 다 친해요. 장항준 감독과도 친하고, 김태용 감독은 함께 일도 했어요. 이번 연휴가 길잖아요. 정말 잘하는 영화쟁이들이 모여 자신들의 능력치를 최대로 뽑아냈으니, 관객분들이 모든 한국 영화를 예쁘게 다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류승완 감독)

1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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