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대사는 오래 전 유행어가 됐다. 심지어 국내 드라마 속 캐릭터를 위해 만들어진 한 줄인양 최근 연예기사엔 이 대사가 오르내렸다. 지난달 종영한 SBS 주말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손여은(채린 역) 때문이다.
“울면 장땡이야? 아빠한테 나랑 이혼하라고 했지?” 의붓딸을 라이벌 삼는 새엄마의 손이 어린애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시댁은 발칵 뒤집히고, 남편은 이혼을 요구한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새 식구를 왕따 시킨다. “두 번 이혼은 절대 안돼. 내가 나갈 줄 알아? 절대 못 나가!” 밤이면 밤마다 술을 마시고 주정도 부렸다. 자동차 타이어가 등 돌린 남편인 것처럼 끌어안고 잠이 들기도 했다. 임실댁(가사도우미)은 연민에 휩싸여 혀를 끌끌 찬다. “친정에선 지 딸이 저러고 사는거 아나 몰러.” 채린을 연기한 손여은에게 ‘미저리’, ‘미친년’이라는 연관검색어가 따라붙었다. “이 구역 미친년은 채린”이라며 시청자들은 욕하면서 열광했다. 눈치 없어 황당무계했지만 안쓰럽기 그지없는 입체적인 캐릭터였다. 보석 사진을 내밀며 좋아하는 시누이에게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가 더 아름답다”는 여자, 그러면서도 아이를 때린 사실을 들키자 가사도우미에게 돈다발을 안기는 섬뜩하고 황폐한 내면을 가진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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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병찬기자/yoon4698@@heraldcorp.com] |
밉상ㆍ진상ㆍ황당 캐릭터로 지지부진했던 드라마의 시청률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던 배우 손여은(31)을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단아했던 ‘구암허준’의 소현을 보시고 김수현 작가님이 캐스팅하셨대요. 처음엔 채린이에 대한 설명이 별로 없어 참한 이미지의 양갓집 규수라고만 생각했어요. 결혼 후 확 달라지더라고요. 채린에게 출구가 있었다면 분란도 만들지 않았겠죠. 채린이는 친구도 없고, 곁에 있어줄 부모님도 없었어요. 그런 것들이 채린에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요.”
복잡다단한 캐릭터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온실 속의 화초는 허상이었다.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할 정도로 명망높은 아버지는 가정에선 폭력을 일삼았다. “그러다 죽을 순 없다”며 엄마에게 참지 말라고 애절하게 말해봐도 가정을 지킨다는 명분 덕에 채린은 폭력가정에서 자랐다. 순진한 생각도 했다. 재혼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줄 알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 남자와의 “무리한 결혼”은 쉽지 않았다. 돈 때문에 결혼을 주선한 시어머니는 기부 사실을 알자 채린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잘 지낼 줄 알았던 의붓딸과의 관계는 자꾸만 틀어졌다. 채린의 미성숙한 자아가 뒤늦게 폭발한 이유였다.

“내가 이해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연기였어요. 악녀라기 보단 그 순간 상황에 반응하는 순수한 사람으로 접근했어요. 정해진 악인과 선인은 없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결말을 알고 연기했다면 편했을 수도 있겠죠. 생각지 못했던 캐릭터로 변해가니 굴곡도 많고 골치도 아팠어요.”
채린의 울분이 폭발한 장면은 손여은의 장기와 만나 명장면을 연출했다.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쳐내려갈 때였다. 일곱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부산 동아대를 졸업한 피아노 전공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김 작가는 손여은에게 명곡을 쳐달라고 했다. “채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신”이었다고 한다. 채린의 한을 표현한 ‘운명’ 이후엔 손여은이 가장 좋아하는 곡인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한때’를 미친듯이 쳐내려갔다. “부서져라 피아노를 즐기고 있다”는 지문 한 줄에 직접 선택한 곡이었다. 화려한 테크닉과 파워를 따라갈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유약한 손가락이지만, 손여은은 “채린의 감정이 격정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곡”이었다는 게 선곡의 이유였다고 한다.

드라마는 채린의 해피엔딩이었다. “뜻밖의 결말”이고 “용서받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하지만 채린은 다시 사랑받는 며느리, 자상한 엄마, 다정한 아내가 됐다. 그 장면에선 쇼팽의 ‘녹턴’이 흘렀다. 이 역시 손여은의 선곡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하며 곱게 자라 돌연 연기자가 되겠다 했을 땐 부모님의 걱정도 많았다. “아버지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좋아하셨어요. 많이 아쉬우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예술은 다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연기를 할 때도 음악을 했던 감성과 연기를 하는 감성에서 비슷한 점을 많이 찾았어요.”

부산에서 나고 자라 우연히 놀러온 서울에서 길거리 캐스팅으로 연기세계에 입문했다. 그 시간이 벌써 10년, 손여은은 MBC ‘뉴하트’, KBS ‘각시탈’ 등 흥행작을 거쳐 지난해 MBC ‘구암 허준’까지 차분히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관심을 많이 받은 작품을 만나 갑자기 눈에 띄게 된 것 같아요. 10년 동안 미숙했지만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왔어요. 지금도 연기를 해나가는 과정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배워본 적 없는 연기지만 손여은은 지금 “주연 잡아먹은 조연배우”로 이름 석 자를 알렸다. 영화 ‘빨간 구두’에서 한 여자의 밑바닥 감정을 보여준 페넬로페 크루즈의 연기에서 영감을 받고, 줄리엣 비노쉬처럼 늘 다른 사람이 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한다. 숨찬 달리기를 한 만큼 당분간은 여유를 가질 생각이다. 2년 전부터 접한 재즈가 부쩍 재밌다고 한다. 잠시 놓았던 재즈 작곡을 하는 데에 시간을 써보겠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