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14번째 한인은행으로 출범한 프리미어 비즈니스 뱅크의 이사진 명단에서 사브리나 케이를 발견했을 때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일었다. 한동안 LA 한인사회 비즈니스 세계에서 찾기 어렵던 이름이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가주내 굴지의 패션디자인스쿨로 성장했던 캘리포니아 디자인 컬리지(CDC)의 설립자요, 학장이었다. 한인 의류업계의 디자인 파트에서 가위와 재봉틀을 없애고 컴퓨터 디자인을 확산 보급한 주역으로서, 가장 활발하게 커뮤니티 활동을 펼친 여성으로서 사브리나 케이라는 이름은 하루가 멀다하고 미디어에 오르내렸던 터이다. 동포사회의 여느 단체장 못지 않은 지명도를 가졌던 그는 지난 2003년 이후 슬그머니 타운의 거리에서 사라진 듯 했다. 북미주에서 71개의 직업교육 관련 교육기관을 운영하는 EMC(Education Management Corp.)라는 회사에 CDC를 매각한 게 2003년 1월. 3년 6개월여의 시간이 흘렀다. 사브리나 케이는 부동산재벌 데이빗 리(제이미슨 프라퍼티 회장)와 더불어 자본금 2천만달러 규모의 은행을 설립한 파트너로 한인 타운 비즈니스 무대의 한복판에 다시 섰다. ■ 벤처 캐피틀 사업가로 컴백 사브리나 케이가 CDC를 매각했을 때 구체적인 대금은 나타나지 않았다. LA타임스같은 신문을 통해 8자리 숫자(천만달러대)라고만 드러난 정도였다. 어찌됐건 사람들은 “평생 놀고 먹고도 남을 만큼 된다더라”는 말로 디자인학교를 설립해 성공적으로 팔아치운(?) 사브리나 케이의 실속 넘치는 수완을 부러워 했다. 40대가 채 되기도 전에 은퇴해도 좋을 만큼 사업체를 정리했으니 원없이 풍요로운 일상을 누리고 있으리라 믿었던 주인공은 유감스럽게도 일반인의 예상과 전혀 딴판인 일과표를 갖고 있었다. 그의 명함에는 프리미어 비즈니스뱅크 이사 외에 ‘프리몬트 프라이빗 인베스트먼트(Freemont Private Investment,Inc.)’와’패션 엄브렐라( Fashion Umbrella LLC.)’의 CEO가 찍혀 있다. 은행은 다운타운에, 투자회사는 산타모니카에, 그리고 패션 회사는 코리아타운에서 머지 않은 라치몬드 빌리지 인근에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프리몬트 프라이빗 인베스트먼트는 말 그대로 투자회사이고, 패션 엄브렐라는 중국을 비롯, 세계 각지의 시장 특성에 맞는 패션의류를 디자인해 공급하는 회사이다. 여성복 브랜드인 ‘사브리나 케이’와 아동복 ‘베이비 케이’ ‘리틀맨’, 액티브 웨어 ‘에스 팩터(S Factor)’, 어떤 장소에나 어울릴 유틸리티패션인 ‘바이스버사(vice versa)’등 4개의 브랜드를 7명의 베테랑 디자이너와 함께 만들어 유통하고 있다. “저를 아는 분들에게 새벽 시간에 이메일을 보내는 건 여전해요. 요즘도 서너시간 잠자고, 주 6일 동안 일하지요. 기도할 때마다 제게 하루를 25시간이 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네요.” ■ 은행 설립, 한인 비즈니스 교육사업의 연장 사브리나 케이는 CDC를 매각한 후 1년 정도 디자인대학 이사장으로 남아 있는 가운데 인수회사인 EMC의 스페셜 프로젝트 담당 CEO로 일했다. 하지만 1990년 자신의 침실에서 6명의 학생들로 시작해 13년만에 800명의 학생을 거느린 디자인 대학을 이루기까지 온통 크리에이티브로 일관해온 그의 체질은 거대 기업 조직 내부의 정치와 관료주의에 맞지 않았다. EMC와 작별하고, 그것으로 CDC와 완전히 손을 뗀 뒤 곧바로 USC 마샬스쿨에 등록, 이그제큐티브 MBA과정을 밟았다. MBA로 무장한 사브리나 케이가 다시 사업에 팔을 걷어부친 건 당연한 코스로 보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CDC설립과 매각, 그리고 최근의 새로운 사업 론칭 등은 그가 디자인대학을 설립할 때 부친에게 창업자금을 빌리면서 작성했던 15년 사업계획의 일환이나 다름없다. 처음 5년간은 생산성있는 학교를 설립하는 데 올인하는 시기로 잡았고, 그런 뒤 5년은 그 학교를 통해 수익을 내는 사업성을 실현하는 기간으로 설정했다.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프로젝트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던 5개년 계획의 1,2차는 성공적으로 끝난 셈이다. 3차 5개년 계획은 지역화했던 교육사업을 본격적으로 세계화하는 일이다. 거기에 필요한 자본을 만들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은행을 설립했다. “한인커뮤니티에만 머물러 있는 은행이 아니라 한인들의 잠재력 높은 비즈니스를 주류사회에 이어주고 그 기회를 교육하자는 차원에서 은행 설립은 제게 단순한 투자가 아닌 교육사업의 연장일 뿐입니다.” CDC시절부터도 학교 운영 외에 여러 곳의 단체와 정부기관 등에 이름을 올려놓고 사회사업과 봉사활동에 열성이었던 인물로 유명했던 그이다. 새로운 사업체의 대표직함과 더불어 그가 손 놓지 않고 있는 사회사업 관련 활동의 단체가 무려 10군데에 이르고 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피눈물나게 일해서 키워놓았던 CDC를 놓아버린 뒤에도 그는 변함없이 바빴던 셈이다. 사브리나 케이는 여전히 우리들 속에 있었다. 사브리나 케이 또한 CDC를 매각하고 확보한 재산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잘 보낼까라는 행복한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EMC와 결별하고 얼마 동안 모처럼 쉬며 놀았을 때 그녀는 너무나 빨리 은퇴계획을 짜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화들짝 놀랐다. 무엇보다 차 한대 다니지 않는 사막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듯한 무료함과 무의미함…. 그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USC 마샬 스쿨을 찾았다. ” 카레이스 트랙을 운전하는 것과 프리웨이를 운전하는 것은 리스크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지요.” 도전과 자극을 원할 때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위험을 받아들이는 게 그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디자인대학 학장 시절 UCLA등에서 초빙교수까지 했던 처지에서 다시 배우는 학생의 입장으로 돌아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2년동안 MBA 클래스에서 사브리나 케이는 새롭게 학습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회계와 경영의 원리와 논리, 리스크 평가 방식 등은 물론 기업가 정신과 인내의 혜택 등 사업경영의 현장에서 미처 쌓아두지 못했던 기업실무와 운영의 이론적 무장을 다지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MBA 강의실을 통해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것을 통해서 믿고 따라오게 하는 리더십을 배웠다고 했다. ” 대학을 운영할 때의 나는 일종의 사람좋은 독재자나 다름없었지요. 학교를 만들고 키우는 과정에서 매사를 직접 챙기고 지시하고, 가르친 대로 실행하게 하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독재자일 수 밖에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을 섬기는 리더(Servant-Leader)가 될 겁니다.” ■ 그룹의 힘 사브리나 케이는 CDC를 시작할 때 부친 김태윤씨(나성 영락교회 장로)가 들려준 충고를 사업가의 원칙으로 간직하고 있다. “회사는 곧 법인인데, 법인이란 곧 법이 만든 사람인 만큼 사람이 사업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해주느냐에 사업의성패가 달려 있다고 강조하셨어요.” “원석을 찾아내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내는 광부와 똑같은 일을 CEO가 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은 다이아몬드 원석같은 가치를 갖고 있고, 그 묻혀진 가치를 찾아내 빛이 나게 만드는 과정이 교육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한가지씩 사명을 주셨다는데 제겐 교육사업을 주신 것이지요.” 한 사람의 힘 보다는 그룹의 힘이 보다 나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당연한 이치를 실감하고 있다는 사브리나 케이는 교육을 통한 비즈니스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사업가인 셈이다. ■ 학장에서 학생으로 돌아갔던 2년 사브리나 케이 또한 CDC를 매각하고 확보한 재산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잘 보낼까라는 행복한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EMC와 결별하고 얼마 동안 모처럼 쉬며 놀았을 때 그녀는 너무나 빨리 은퇴계획을 짜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화들짝 놀랐다. 무엇보다 차 한대 다니지 않는 사막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듯한 무료함과 무의미함…. 그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USC 마샬 스쿨을 찾았다. ” 카레이스 트랙을 운전하는 것과 프리웨이를 운전하는 것은 리스크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지요.” 도전과 자극을 원할 때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위험을 받아들이는 게 그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디자인대학 학장 시절 UCLA등에서 초빙교수까지 했던 처지에서 다시 배우는 학생의 입장으로 돌아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2년동안 MBA 클래스에서 사브리나 케이는 새롭게 학습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회계와 경영의 원리와 논리, 리스크 평가 방식 등은 물론 기업가 정신과 인내의 혜택 등 사업경영의 현장에서 미처 쌓아두지 못했던 기업실무와 운영의 이론적 무장을 다지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MBA 강의실을 통해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것을 통해서 믿고 따라오게 하는 리더십을 배웠다고 했다. ” 대학을 운영할 때의 나는 일종의 사람좋은 독재자나 다름없었지요. 학교를 만들고 키우는 과정에서 매사를 직접 챙기고 지시하고, 가르친 대로 실행하게 하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독재자일 수 밖에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을 섬기는 리더(Servant-Leader)가 될 겁니다.” ■ 그룹의 힘 사브리나 케이는 CDC를 시작할 때 부친 김태윤씨(나성 영락교회 장로)가 들려준 충고를 사업가의 원칙으로 간직하고 있다. “회사는 곧 법인인데, 법인이란 곧 법이 만든 사람인 만큼 사람이 사업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해주느냐에 사업의성패가 달려 있다고 강조하셨어요.” “원석을 찾아내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내는 광부와 똑같은 일을 CEO가 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은 다이아몬드 원석같은 가치를 갖고 있고, 그 묻혀진 가치를 찾아내 빛이 나게 만드는 과정이 교육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한가지씩 사명을 주셨다는데 제겐 교육사업을 주신 것이지요.” 한 사람의 힘 보다는 그룹의 힘이 보다 나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당연한 이치를 실감하고 있다는 사브리나 케이는 교육을 통한 비즈니스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사업가인 셈이다.
황덕준 / 미주판 대표겸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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