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VISION] (14) 제너럴금융 고동호 사장


▲ 창립 첫해부터 수익성 위주의 경영으로 해마다 20% 이상씩 성장해온 제너럴 금융의 고동호 사장은 “누구에게나 상환 부담없이 사업자금을 지원해줄 수 있는 비영리 금융재단같은 걸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사진 / 김윤수 기자

 ⓒ2006 Koreaheraldbiz.com

 ■ 팩토링업계의 산 증인

제너럴금융은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팩토링업계의 외형 기준 순위로 보면 4위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대략 연간 20억 달러에 이른다는 한인 팩토링 시장 규모의 절반 가량을 선두주자인 하나금융(대표 서니 김)이 차지하고 있고, 파이낸스 원(대표 김기현) 프라임금융(대표 저스틴 채)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하지만 회사의 규모나 시장 점유율과 상관없이 제너럴금융을 이끌고 있는 고동호 사장은 팩토링업계의 메이저 피겨(주력 인물)이다. 지난 95년 하나금융이 한인 팩토링기관의 1번 타자로 출범할 때부터 파이낸스 원과 프라임금융 등 후속 업체들이 생길 때마다 고 사장이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한인 팩토링 업계의 형성과 성장의 과정에서 고 사장은 마치 증인같은 존재로 각인돼 있다.

“90년대 초반 은행권 사람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이른바 금융파동의 여파로 은행의 고급 간부들 몇이 나와 제2금융권의 기초를 다진 게 팩토링의 시초인 하나금융이었지요. 팩토링이 예상 외로 급성장하는 바람에 하나금융 창업에 관여했던 저를 비롯한 사람들이 차례로 독자적인 회사를 세우면서 오늘날 한인 팩토링업계를 구축한 셈이지요.”

고 사장은 지난 10여년 사이에 이뤄진 한인 사회 제 2금융권의 이합집산을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다. 배경이 되는 사건과 시기 등을 마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여주듯 술술 짚어나갔다. 한인 팩訝돗耽窩?길지 않은 역사를 반추하는 일은 로컬에서만 금융인의 잔뼈를 굵게 키워온 그로서는 특정 한인은행의 조직도를 그려보는 일만큼이나 어렵지 않은 ‘집안  일’인 듯 보인다.
□비영리 금융재단 설립을 꿈 꾼다

2001년 파이낸스원을 나와 불과 보름만에 펀딩을 마치고 제너널 금융을 창립했을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소심하다 싶을 정도로 돌 다리도 두들겨가는 스타일인 그가 직접 창업을 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야망이나 야심이 남다르다거나 업무를 추진할 때 적극적이고 공격적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거든요. 제가.”

은행원 10년에 팩토링 경험 5년을 보탠 경력에서 당시 고 사장은 자신에게 고향과도 다름없는 은행을 차려보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바탕으로 제너럴금융을 시작했다. 투자자들의 상당수도 그의 은행설립에 대한 꿈에 기대를 걸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장 몇해만에 이루겠다는 성급함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마음 속 깊숙히 언젠가 회사가 안정되게 성장하면 나도 한번 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뭐, 그런 정도의 꿈이었지요.”

어느덧 5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은행 설립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하진 않고 있다.

“은행을 해보겠다는 것은 꿈이라기 보다 원초적 귀소본능에 따른 향수쪽에 가까운지도 모르지요. 팩토링을 은행 못지 않게 재미있게 하고 있다보니 그게 반드시 해야겠다…뭐, 그런 쪽의 계획은 아니지요.”

그에게는 은행을 세우겠다는 것이 막연한 계획이라면 상환부담없이 사업의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비영리 금융재단을 만들고 싶은 것은 그야말로 현실화하고 싶은 꿈이다.

 ■ 수익성 위주 내실 운영

그는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을 만큼 안정을 중시하는 경영 스타일을 갖고 있다. 남들이 외형을 키우는 성장주의에 무게를 둘 때 그는 조용히 내실을 다지는 편이었다. 한마디로 매출 규모를 작더라도 수익을 내는 방향으로 운영해왔다. 창업한 첫해 결산부터 투자자 14명에게 이익을 돌려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안정위주로 운영을 했기 때문이다. 해마다 20~25% 씩 성장한 끝에 자본금 500만달러, 자산 3천만달러에 매출규모 연간 2억달러에 이를 정도로 키워오다보니 창업 당시 자금을 던졌던 투자자들이 한명도 움직이지 않고 지금껏 그를 지원하고 있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운영하면 안정 위주가 될 수 밖에 없지요. 내가 맡고 있는 동안만을 생각하는 회사가 아니라 앞으로 50년,60년 이상 살아 움직이는 팩토링회사가 돼야하니까요. “

제너럴금융에서 일하는 13명의 직원은 거의 창업 당시 얼굴 그대로이다. 회사의 안정성은 투자자와 임직원을 동요시키지 않은 무기가 됐고, 그것이 고 사장을 팩토링업계에서 주력인물로 간주하는 첫번째 요소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어느 곳보다 팩토링업무에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이 고사장을 중심으로 뭉쳐 있어 신규사업을 창출하는 데 있어서도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쟁사들이 힘겨워 하는 리싱(Leasing)업무라든가, 주택 융자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는 원천이 고사장이 가진 맨파워이다. 수석 부사장으로 고 사장의 오른팔격인 엘렌 손씨와 클럭(Clerk) 출신인 주디 김씨 등은 1~2년쯤 지나 고 사장이 설사 일선에서 한발 물러서더라도 제너럴금융을 탄탄하게 몰고갈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을 갖춘 인력들이다.

팩토링회사의 최고경영자로서 자화상을 그릴 때 고사장은 다소 자조적이다.

 ”거의 사채업자나 다름없지 않겠어요?”라는 말로 CEO의 역할을 규정한다. 은행에서 대출이 거절 당한 사업자들이 오는 곳이 팩토링인 만큼 클라이언트의 융자금 추이를 지켜보는 일은 그의 업무 A요, Z이다. 그렇다해도 담보 위주가 아닌 거래매출을 근거로 대출이 이뤄지는 관계에서 팩토와 클라이언트의 유대감이 단단해질 수 있도록 다져나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돈을 다루는 업무인 만큼 은행에 비해 제도적인 규정에서 비교적 제재가 덜한 팩토링회사의 최고책임자는 누구보다 청렴성이 높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한인사회의 제2 금융권 회사들은 사장의 결정권이 거의 절대적입니다.그런만큼 지나치게 공격적이면 절제하기가 어려워지고, 그것이 금융사고로 이어질 위험을 낳지요.”

안정과 내실은 그에게 여전히 소중한 덕목이다. 

 ■ 고동호사장은

70년대말 서울 대성고를 나와 가족과 함께 이민, 칼스테이트 롱비치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84년 가주외환은행에 입사,로컬 금융계에 발을 디딘 이후 가주외환은행 윌셔지점장, 중앙은행 웨스턴 지점장, 나라은행 특수여신 담당 등을 거쳐 95년 LA 한인사회 첫번째 팩토링회사인 하나금융 창업멤머로 자리를 옮겼다. 98년말 김기현씨와 함께 파이낸스원을 창립, 사장을 맡은 뒤 2001년 5월 제너럴금융을 세워 독립했다.


황덕준 / 미주판 대표겸 편집인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