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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뱅크카드 서비스 패트릭 홍 사장은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을 하고 싶었고, 첫번째 목표는 이뤘다.”고 말한다. 그의 다음 목표는 나스닥 상장이다. 사진 / 김윤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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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초, 그러니까 22년전 이 맘때 쯤이다. 울산경비사령부에서 30개월간의 군 복무를 갓 마친 25살의 청년은 콜로라도주 덴버 공항에 발을 디뎠다. 휑한 미국 하늘. 추웠다. 신병 훈련소 정문에 막 들어섰을 때 느낌같았다고나 할까. 군에 있는 동안 이민을 떠난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라지만 그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내가 누구냐. 주특기 106 무반동총 사수로 지옥같은 해안경비를 치러낸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아닌가.’
스포츠형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청년은 어금니를 물었다. 난생 처음 호흡하는 이국땅의 공기가 도무지 생경하기만 했으나 이제부터 살아가야할 날이 창창했다.
“청소든 페인트칠이든 뭐든지 하자.”
아주대 화학공학과 시절 컴퓨터도 공부했겠다, 이곳 저곳 배포좋게 미국회사만 골라 이력서를 보냈다. 케미컬 전문가요, 컴퓨터 지식까지 겸비했다고 다소 과장되게 작성한 레지메를 보고 미국인들이 운영하는 회사 곳곳에서 일자리를 주었다. 웬걸,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전문가(?)였으니 어쩌랴. 공항에서 결심했듯 청소 일을 하고, 페인팅도 했다. 비전도,결과도 없는 일이라는 회의감…. 20대 후반 나이의 청년으로선 당연한 자각이었다. 게다가 덴버는 겨울이 너무 길었다. 춥고 배고픈 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가족들을 설득, 캘리포니아로 이삿짐을 옮겼다. 1986년이었다.
빈 손으로 20년만에 외형 4,400만달러 회사로 키워
LA에 정착한 지 20년. 청년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갓 제대한 사람처럼 스포츠형으로 남아 있다. 듬성 듬성 흰머리카락이 섞이긴 했지만 구리빛 피부에 군살없는 몸매는 여전하다. 달라진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3055 윌셔 블루바드 오피스빌딩 외벽에 당당히 붙여 놓은 자신의 회사 이름이다.
8개 부서에 임직원 153명. 미 전역 15개지역의 브랜치. 1만5천개의 어카운트. 연간 외형 4천4백만달러-. 홍성두라는 이름의 적수공권이던 청년은 뱅크카드 서비스(Bankcard Services)의 패트릭 홍 사장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뱅크카드 서비스나 홍 사장이 커뮤니티에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4~5년전이다. 1987년 뱅크카드 서비스가 설립돼 19년의 연륜을 쌓고 있다는 사실에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가 부잣집 출신인 실버스푼인 줄 아는 분들이 적지 않더군요.”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느닷없이 등장한 회사라는 뱅크카드 서비스에 대한 한인사회의 오해를 홍 사장은 그렇게 표현했다.
일반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것은 고사하고 커뮤니티의 허다한 단체에 이름을 걸어놓지도 않았고, 크고 작은 모임에 얼굴을 비춘 적도 거의 없으니 사실 홍 사장은 한국 어느 재벌가의 막내 아들쯤으로 소문날 만했다. 뱅크카드 서비스만한 규모의 로컬기업이 생길 수 있을 만큼 한인사회의 경제규모가 커졌음은 알면서도 그것이 100% 오너십을 가진 1인 경영 체제로 어찌 가능하겠느냐는 이민사회의 편견은 홍 사장의 배경에 대한 정보 부재와 맞물려 제멋대로 퍼져가는 참이다.
“술 담배도 못하고, 골프는 전혀 못 치지요. 게다가 조미료에 매무 민감한 체질이어서 외식조차 거의 하지 못하니 회사 안에 틀어박혀 일만 할 수 밖에요.”
자신의 기호나 취향이 대외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엮어가기에는 맞지 않았다는 해명이지만 기실 “직원들 교육하랴, 고객 서비스하랴, 회사 안에서 해야할 일이 워낙 많다”는 덧붙임쪽이 그의 모습을 타운 한 복판에서 보기 힘든 이유에 더 가깝다.
“부가가치 높은 사업 만난 건 행운”
페이먼트 프로세싱 서비스라는 개념의 사업에 일찌감치 눈을 뜬 계기는 지극히 우연이다. 덴버에서 LA로 이사한 뒤 6개월여 동안 광고 판촉 회사에 몸 담았다. 같은 건물을 쓰던 한 미국인이 크레딧 카드를 카본 카피 종이에 대고 밀던 단말기를 팔고 있었다. 컴퓨터를 공부해봤던 깜냥으로 도서관을 뒤져서 당시에 막 등장했던 스마트 카드에 대해 공부했다. 뭔가 독자적인 응용프로그램을 칩에 담으면 여러가지 서비스가 가능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때마침 직원들과 싸우며 회사 운영에 힘겨워 하던 옆 사무실의 미국인으로부터 단말기 세일즈 분야를 넘겨 받았다. 87년 가을 첫번째 단말기 판매가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9년 가깝게 홍 사장은 아무도 몰라주던 비즈니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혼자만의 서바이벌게임을 했다.
“9년 동안 내 개인 소득은 거의 없었지요. 세금보고할 때 전년도 소득으로 몇천 달러를 두어번 적어넣었던게 그나마 조금이라도 벌었을 때였을 겁니다.”
이민 1세대들이 대부분 소매업에 종사할 때 그나마 자신은 부가가치가 있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버텼다. 아니,그땐 뚝심이었겠다. 94년 무렵까지만해도 터미널 세일즈 회사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9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야 비로소 생존단계에서 벗어나기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결혼도 했다. 직원이 40여명으로 늘어난 99년 무렵부터 회사다운 조직과 체계가 마련됐다. 신문광고 등으로 대외 홍보를 조금씩 하면서 회사를 알리기 시작한 게 2000년. 뱅크카드 서비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회사처럼 여겨진 까닭은 그만큼 맨 바닥에서 신산스러운 시절을 길게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창업하고 서바이벌 기간이 길어질 때는 (업종) 선택, (회사) 운영, 길 셋 중 하나가 잘못된 것이지요. 그래도 길을 잘 못 들었다는 생각은 안했습니다.내가 모자라고 몰라서 힘든 것이라고 믿고 날마다 공부했습니다. 케이스를 연구하고, 숫자를 나열해서 맞춰보고…그건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습관이 돼버렸지요.”
뜬금없이 “제 피가 AB형이거든요.”라고 한다.
“AB형은 자기합리화와 변명이 특징이라더군요. 안되면 안되는 대로 맞춰나가자…뭐, 그런 AB형의 스타일로 버틴거지요.”
일일이 얘기하기 어려운 자신의 노력을 강조할 법 하건만 홍 사장은 뜻밖에도 “사업의 성공에는 운(運)이 절대적”이라고 못 박듯이 말한다.
“노력은 누구나 하거든요. 돈 있고, 노력한다고 누구나 성공합니까? 결정적인 것은 운입니다. 제가 세상을 배울 때 새로운 개념의 사업을 만난 게 운이지요.”
부가가치가 있는 사업을 키웠으니 이제 다른 형태의 자산으로 바꾸는 능력을 개발하는 쪽에 힘을 모으고 있다. 아울러 분배와 커뮤니티 환원을 중시한다. 뱅크카드 서비스가 장학사업과 양로복지 활동에 팔을 걷어부치는 것은 시작일 뿐이라고 했다.
“커뮤니티의 수많은 고객(머천트)들과 직원들의 팀웍에 힘입어 커진 회사인만큼 혜택과 환원, 봉사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 뱅크카드 서비스는
도소매업소를 대상으로 일정 수수료를 받고 신용카드의 전반적인 프로세싱을 처리,진행,관리하는 머천트 어콰이어러(Merchant Aquirer)이다. 1987년 7월 패트릭 홍 사장이 설립, 올해 매출 4천4백만달러를 바라보고 있다.
미 전역에 1만5천여개 어카운트를 통해 20억달러에 이르는 카드 거래량을 프로세싱하고 있다. 어카운트 중 한인업소는 65% 정도이다. 개인이 운영하는 가맹점 서비스회사로는 미국에서 상위 15위권에 꼽힌다. 앞으로 3년쯤 뒤 나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 황덕준 / 미주판 대표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