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티어&리더] 커뮤니티 파워의 선봉장…하기환 전 LA한인회장

미주 한인사회가 일대 변혁의 시기를 맞고 있다.1세대와 1.5세,2세로 불리는 세대층이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이민커뮤니티의 프리즘은 한국 사회의 위기였던 IMF 이후 유입된 2000년 이후의 신이민자 그룹이 합해져 그 갈래가 한층 다채로와졌다.

조기유학 열풍과 해외투자 자유화에 따른 부가자본이 보태지면서 미국내 한인 사회의 경제규모와 생할상은 더이상 단순한 카테고리로 분류하기 어렵다. 이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한국인에 대한 무비자 혜택이 머지 않은 장래에 현실화될 가능성이 얘기된다.

바야흐로 이민사회는 ‘빅뱅’에 버금가는 창조적 파괴의 대변화를 체험할지 모른다.급변하는 만큼 예측이 어려워지는 시기에는 늘 선구적인 체험기들이 소중해진다. 

이국땅에 삶의 터전을 마련, 오늘날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고 지켜봐온 이민사회 증인들의 경륜은 미래의 거대한 물결이 어디로 흐를 것인지 가늠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프런티어라 부른다. 리더일 수도 있다.

헤럴드경제는 송구영신과 근하신년의 해가름 때에 맞춰 그들을 만나본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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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한인 커뮤니티에서 하기환씨는 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꼽혔다. 유명한 만큼 악명도 높았다.

“그랬지요? 시비의 소용돌이마다 늘 내가 있었지…”

오랜만에 만난 하씨는 전혀 부인하지 않았다.

한인회장을 지낸 4년 동안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윌셔-코리아타운 주민의회 제명 소동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잡음 속에는 대체로 하씨의 이름 석자가 포함돼 있었다. 왜 그렇게 싸움 한복판에 있을 수 밖에 없을까, 지겨울 법도 한데 말이다. 꼭 한번 묻고 싶었다.

“남들이 힘으로 누르려고 하면 끝까지 싸우려 하는 편이지요.”

그가 말하는 억누르려는 힘이란 언론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다. 인간적인 모욕을 주는 경우일 때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언론이 단체를 쥐고 흔들려고 한다고 느꼈을 때 그는 남들처럼 굽히지 않았다. 맞대거리로 나섰다. 목소리가 달리자 스스로 주간신문을 만들어 자신의 입장을 고스란히 전하기도 했다. 적당히 타협하고 협력하면 좋았을 터인데 성격적으로 그러질 못했던 모양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좋은 게 좋다,라는 겁니다. 똑바로 잡아나가지 않으면 뒤틀리는데 뭐가 좋은 게 좋겠습니까.”

그의 반발심리는 성장환경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의사였던 부친이 워낙 완고하게 다스렸다. 성장기의 아들은 끓는 피를 주체하기 어려운데 부친은 당신이 정한 틀 속에 가둬 키우려 했다. 권위에 대항하고 반발하는 습성은 그때부터 생겼을 것이라고 하씨 스스로 추정한다.

하씨는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편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기저기서 부르고 커뮤니티 활동에 자신이 낄 자리가 생기는 것은 적이 많은 만큼 지지자도 많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를 서포트하는 사람들은 대개 ‘골수’ 하기환 팬입니다. 아무리 싸워도 인간적인 모욕감을 주는 일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스스럼없이 만나고 교류를 이어가지요. 나름대로 내가 의리는 있는 편입니다.”

커뮤니티의 힘이 목표

도대체 하씨가 목표하는 바는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이 갑자기 생긴다. 욕 먹고 적이 생기는 커뮤니티 활동에 그토록 집착하는 까닭 말이다.

“우리 한인사회의 경제적 역량에 비해 정치적 파워는 여전히 약한 현실을 고치고 싶은 겁니다. 4·29 폭동이 일어났을 때 한인사회에선 전화 한통 걸어서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지요. 뼈저린 경험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커뮤니티의 정치력 신장이 그의 궁극적인 방향이다. 얼마든지 파워를 키울 수 있는데도 결집되지 않으니 그가 목소리를 높이는 셈이고, 그의 목청이 열리면 시끄럽고, 시비가 따랐겠다 싶어진다.

“나도 영락교회 신자이지만 우리 한인사회의 연간 교회 헌금액이 아마 2억달러 규모는 될 겁니다. 그 0.5% 만 정치력 키우는 데 활용하면 뭐든지 얻어낼 수 있는데 그게 안되거든요. 한인들이 천국 가는 데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커뮤니티의 힘을 기르는 데 인색한 이유를 모르겠어요.”

몇해전 하씨는  시와 카운티 주, 연방정부 등에 속한 정치인 25명에게 1인당 2만달러씩의 정치기부금만 모여주면 한인사회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룰 수 있다는 관점에서 가칭 ‘폴리티컬 액션(Political Action)’이름의 단체를 만들려하기도 했다.

이제 즐길 차례

여러차례의 법정소송을 비롯,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인회장 임기를 두차례나 연임하고 2004년 물러났을 때 섭섭했을까, 후련했을까.

“4년이나 했으니 섭섭할 건 없고, 시원했지요. 굽히지 않고 소신껏 해냈다는 자부심도 느꼈고요.”

이른바 커뮤니티의 공직인 단체장을 그만 둔 뒤에도 하씨는 이곳저곳 모임과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15년째 활동하고 있는 라이온스클럽 멤버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98년부터 맡고 있는 코리아타운 경찰후원협회라든가 주민의회 등을 통해 꾸준히 커뮤니티 발전의 연결고리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연간 150여일 가까운 시간을 여행으로 보낼 만큼 한결 여유로운 일상을 되찾은 것은 이제부터 퍼스널 펀(Personal Fun)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황덕준 / 미주판 대표겸 편집인

얼굴3개

■ 하기환씨의 비즈니스

하기환씨는 비즈니스맨으로서 낙폭을 크게 경험했다. UCLA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인 서울대 교수로 임용되기 직전 휴즈항공사에 취직돼 미국생활에 뿌리를 내려버린 뒤 70년대 말 상업용부동산 브로커로서 개발업자로서 사업기반을 다졌다.

80년대 중반 2,500만달러의 융자금으로 800유닛에 이르는 아파트와 콘도, 그리고 미드윌셔가의 사무용 빌딩 2개를 매입했다가 폭동과 지진을 겪으면서 90년대 초반 부동산 시장이 추락하자 덩달아 바닥까지 내동댕이 쳐졌다.부동산들이 차압 당한 가운데 빈털털이가 될 뻔한 상황에서 다시 일어서게 해준 유일한 근거가 한남체인이었다.

“89년쯤이었을거야. 김진수씨가 찾아와 당시 알파베타란 이름을 가진 지금의 한남체인 마켓을 사자고 하더군. 90만달러만 있으면 된다고 해서 처음 보는 사람이나 다름없었지만 어쩐지 예감이 좋아서 그러자고 하고 샀지. 그게 부동산 파동으로 어려워졌을 때 생활비를 대줄 줄은 몰랐어.”

그때 김진수씨에게 40%의 지분을 주었다. 김진수씨와의 동업 인연은 그렇게 시작돼 지금까지 아무런 갈등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남체인 매입을 계기로 이후 김진수씨가 권하는 투자 제안들은 대체로 수용, 윌셔갤러리아, 채프만 플라자 등을 사들일 수 있었다.

하씨는 부동산이 주저 앉았을 때 경쟁에서 지면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오는 지를 체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600유닛 분량의 아파트와 총규모 15만 평방피트에 이르는 대형 쇼핑센터를 갖고 있는 자신의 재력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내년에는 코리아타운 버질과 5가에 자리한 3만4천여 평방피트 빈땅에 74유닛짜리 5층 콘도를 짓고, 라스베가스에 한남체인을 세우는 등 사업계획이 만만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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