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호 전 한인의류협회장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한인 의류업계는 12년 동안 정말로 많은 일들과 그에 걸맞는 놀라운 성장을 해왔다.
12년전 폐소화 폭락이라는 위기를 맞은 한인의류업계는 50%가 넘는 중남미계 비중 그중 절반 이상을 멕시코와의 무역을 해오던 시장구도의 대대적인 변화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갔던 때로 기억된다.
이제는 보편화된 미국의 대형 백화점과 할인점 등과 타주 중간도매상과의 연결고리가 이때부터 생기게 됐고, 유럽, 아시아, 중동지역뿐 아니라 최근엔 신흥 시장으로 부각되고 있는 아프리카 지역 등 세계각지에 자바 한인들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시장 다변화에 성공했다.
판매 뿐 아니라 생산 역시 2000년 초반부터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 등으로 다변화를 꾀해 원가 절감을 위한 노력을 현재도 진행중이다.
이러한 생산과 판매 등 기본적인 다변화 뿐 아니라 그간 값싼 의류라는 고정 관념을 과감히 탈피, 프리미엄 청바지와 중고가 여성 의류의 브랜드화와 포에버 21과 같은 대형 의류 유통 업체들이 한인들의 힘으로 성장했다는 것도 지난 12년간 의류업계가 만들어온 발자취 일 것이다.
지난 한해 전반적인 미국 경기부진으로 극심한 불경기를 겪은 한인의류업계는 지난 12년간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 할 수 있는 나름의 자생력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불경기 속에 과도한 가격경쟁과 디자인 도용 등 12년간 지속돼온 문제를 넘어 시장 및 생산기지 다변화를 통해 원가 절감과 매출 증대라는 두마리에 토끼와 함께 합리적인 경영 혁신까지 더해진다면 한인 경제의 젖줄인 한인의류업계의 또다른 12년 역시 변화속에 성장을 거듭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경준 기자
한남체인 구정완 사장
1990년대 중반까지 마켓은 미국으로 이주해 오는 한인들의 정류소와 같은 곳이었다.
한인타운의 크게 형성돼 있던 LA에도 불과 2~3개에 불과했던 한인마켓은 식료품 구입부터 일자리 제공까지 이민 초기 생활터전 역할을 톡톡히 했다. 때문에 대형마켓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인타운이 형성되면서 LA 한인타운 역시 급성장한 셈이다.
그렇게 미국 땅에 발을 디디면서 앞다퉈 마켓부터 달려와 항상 가동 인력이 풍부했던 마켓은 이제 옛말이다. 한인들이 한국에서 이미 자금력을 갖추고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면서 마켓은 기피 업종에 속하고 있으며 만성적인 인력난을 겪고 있는 게 지금 마켓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는 마켓의 성장에 기인한 때문이기도 하다. 규모면에서 한인마켓은 지난 12년 사이에 3~4배 이상 성장했으며, 제법 규모가 컸던 단일 매장들이 체인화되면서 외곽 지역으로 확장된 것도 두드러진 변화이다.
당시 대형 마켓에 속했던 한남체인과 가주마켓이 각각 2~3개 매장이 운영됐으며, H마켓도 LA 단일 매장이 운영됐다. 지금은 각 마켓별 매장이 5~6개로 매장이 늘었으며, 전체 한인마켓이 20여개 이상에 이른다. 이러한 경쟁에서 버텨내기 위해서는 좋은 물건을 값싸게 보급한다는 기본 능력에 출중한 경영의 묘까지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각 마켓 규모도 눈에 띄게 확장됐다. LA 외곽 지역의 한인마켓 규모가 8000~1만sqft정도였으며, LA에서도 2만5000sqft 정도면 대형 마켓으로 인식됐지만, 지금은 4만5000~5만sqft 정도까지 규모가 확정되고 있는 것이다. 매장 방문객 수도 12년 전에 비해 3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 이와같은 마켓 대형화 추세는 불가피한 현상이라 여겨진다.
마켓 취급 품목도 기본 식재료 중심에서 건강과 기능성이 부각되는 식품으로 다양화되고 있는 것도 큰 변화이다. 식문화가 발달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마켓 취급 품목도 같이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지난 12년 사이에 한인마켓은 대형화·전문화·체인화되고 있으며, 마켓 내부와 주변의 쇼핑 연계로 원스탑 쇼핑공간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것이 마켓을 둘러싼 변화이다.
나영순 기자
벤자민 홍 새한은행장
지난 12년간 한인은행들의 발전은 눈부셨다. 규모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많은 변화가 있지만 가장 큰 변화는 한인은행들의 나스닥 상장이 아닐까 싶다.
지난 1998년 나라은행장으로 있으며 한인은행중에는 처음으로 나스닥 상장을 성공시켰다. 그전에 한미은행장으로 있을때만해도 이사들이 경영권 문제로 반대가 심해 하지 못했지만, 결국 나라의 주식이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며 한미, 윌셔, 중앙 등 다른 은행들도 상장에 나서게 됐다.
상장 전만해도 한인은행의 주식은 중국계 은행들에 비해 절반의 평가도 받지 못했다.
상장이 됐기에 은행들이 몸집불리기가 아닌 수익성 위주의 경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은행들의 상장은 이후 한인은행가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요즘도 계속되는 직원쟁탈전도 그렇지만, 직원들의 대우가 크게 개선되고 직원들 스스로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외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LA은행들이 타주에 진출하고, 예전과 달리 SBA대출이 크게 늘었다. 한국의 IMF 위기로 한국에서 온 은행들이 모두 철수하면서 나라가 뉴욕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게 계기가 돼 은행들이 타주 진출에 눈을 떴다. 나라가 뉴욕에 처음 갈때 의심스러운 눈길이 많았지만, 이제 한인은행들은 뉴욕, 애틀랜타 등 전국으로 뻗어가고 있다.
SBA대출도 이제는 은행들의 수익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이렇게 많지 않았지만, 이제는 LA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은행들의 SBA대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염승은 기자
남가주한인부동산협회 크리스 엄 회장
12년 사이에 전화번호부 두께의 ‘MLS 북’이 ‘MLS.com’ 웹사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에이전트들은 1주일에 한 번씩 각 부동산회사로 배달되던 ‘MLS 북’을 먼저 보려고 실랑이를 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업계에 종사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셀러·바이어까지 거의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게 됐다.
에이전트들이 매물을 찾는 웹사이트들에도 이제는 대부분 게스트 코너가 운영되면서 업계 종사자들로서는 보다 민첩한 일처리와 정확한 정보, 풍부한 지식이 요구된다. 부동산 업계에 종사한다는 게 대중화됐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한편으론 전문성에 대한 요구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치밀해 지고 있는 고객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서는 이 업계에 발붙이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런 업무상의 변화와 더불어 지난 12년은 부동산 사이클의 움직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시간이었다. 90년대 중반은, 1992년 LA 폭동 사건에 이어 94년 노스릿지 지진 등 외부적 충격으로 부동산 시장이 폭락한 시점이었다.
당시도 넘치는 차압매물이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어 너나없이 생계 근심이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당시의 급격한 불황은 1999년 무렵부터 시작된 부동산 시장의 장기 호황으로 어느 분야보다 선호하는 유망업종으로 급부상했다.
시장의 호황은 업계 종사자들의 수익을 급격하게 상승시켰으며, 적절한 부동산 투자로 커뮤니티 경제력을 크게 변화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보다 에이전트 라이센스 취득자도 급증했는데, 자료에 의하면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에이전트들 가운데 2001년부터 2003년 사이에 라이센스를 취득한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러한 추세가 반영된 때문이다.
올해는 부동산 시장의 장기 호황세가 꺾이면서 경제 전반으로 침체의 파급이 이어지고 있지만, 사실상 지난 90년대 중반에 비하면 위기감으로 인식되기에는 과장된 해석이라 여겨진다.
전반적인 부동산 가격이 10여년 전에 비해 여전히 몇 배씩 급등해 있으며, 90년대처럼 10유닛 이상의 아파트 등 투자용 커머셜 부동산이 차압매물로 나오고 있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지 부동산사이클이 하락한 시기이며, 내년 가격을 낮춘 차압매물이 바이어에게 매입 동기를 부여하면서 비교적 수월하게 침체기에서 벗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나영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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