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은행장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희망찬 새해가 시작됐지만 한인은행가의 분위기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이달 중으로 발표되는 지난해 4분기 실적에 대한 부담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부진을 책임진다며 자리를 떠난 행장들의 빈자리가 유난히 커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난해부터 유니티은행의 임봉기 행장을 시작으로 윌셔의 민수봉 행장, 한미의 손성원 행장 등 총 3개 은행의 수장이 바뀌거나 바뀌는 과정에 있다. 은행권에 밝은 관계자들은 너무도 잘난 이사들을 둔 A 은행장, 이사회의 신임을 얻지 못해 좌불안석인 채로 있는 B은행장, 직원수마저 절반으로 줄어들며 힘든 나날을 보내는 C은행장 등은 지난 연말을 강타했던 은행가의 인사태풍 여파로 올해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수군거리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타운에서 발행되는 어떤 매체는 ‘행장은 곧 송장’이라는 끔찍한 표현까지 구사할 정도이다.

최근에 만난 한 은행인은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 전 의장이 왔더라도 작은 코리안마켓에서 14개 은행들이 벌이는 경쟁 속에 불경기까지 겹친 지금의 어려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바꾼다고 해도 후임 행장감도 없지 않은가”라며 한숨지었다. 결국 과당경쟁으로 인한 인력난이라는 해묵은 문제가 또 한번 불거지는 셈이다.

지금의 한인 은행가를 보면 지나친 경쟁으로 이제 몇 안남게된 가발회사들이 떠오른다.

지난 1980년대 한인들의 가발 사업은 미국 전체 시장을 주름잡을 정도였고, 이제는 미국 시장을 호령하는 ‘로얄아이맥스’라는 굵직한 한인기업을 키워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명이 5달러의 마진을 남기고 가발을 팔면 바로 길 건너에서 3달러를 남기고 파는 업체가 생겨나고, 또 그 옆에서는 1달러를 남기는 가게가 들어섰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가격 경쟁 밖에 없다’라는 지극히 원시적이고 단순한 논리를 내세우다가 결과적으로 제 살을 깎는 고통이 뒤따랐고, 끝내 몇 남지 않은 채 모두 이민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LA 한인사회에서 잘 알려진 한 올드타이머 인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잘 아는 유태인 친구가 하는 말이 어째서 한인들은 그렇게 장사를 못하느냐고 하더라. 어디 누가 먼저 죽나 보자는 식으로 달려들다가 결국 다 같이 죽고 말았으니 그처럼 한심할 데도 없다”라고 개탄했다.

늘 나돌던 얘기지만 올들어 한인은행들 간의 인수 합병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이 부쩍 자주 나온다. 완벽한 해결책은 될 수 없을 지언정 인력난이나 과당경쟁 등 작금의 한인은행가가 처한 어려움을 해소하는 차선의 선택일 법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전한 경쟁은 새로운 도전과 창의성을 불러오는 자극제가 되지만 경쟁이 지나쳐 모두가 힘들게 된다면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순리일 것이다.

남이야 어떻든 우리는 우리 길을 가는데 무슨 상관이냐 되묻는다면 딱히 할말이 없다. 시장의 자유로운 원리에 따라 자원을 나눈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돈이 최우선시될 수 밖에 없고, 내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이래라 저래라하긴 뭣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은행업은 공공의 자본으로 운영되는 비즈니스이기에 사유기업의 형태라 해도 공적인 감시와 견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한인 가발업계의 사례가 은행업계에서 똑같이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제살깎기식 경쟁으로 인한 폐해로 얻은 교훈만큼은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염승은 미주본사 취재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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