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생명선을 지켜달라

지난 6일 LA지역의 비디오 대여업주들이 KBS아메리카 본사 앞에서 벌인 항의 시위는 그동안 누적돼온 비디오 대여업주들의 고충이 표면화된 결과이다. 미 전역 한인 비디오대여업소들이 고충을 호소하기 위해 전화와 서신으로 책임자 면담을 거듭 요청해오다가 이뤄지지 않자 시위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어지간한 세상사의 갈등이라면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할 법한 50대 연령층의 업주들이 항의방문이나 시위라는 행동으로 의견표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 고충의 깊이가 어느 정도일까 가늠할 만하다.

식당,카페,세탁소,리커스토어 등과 더불어 가장 인기있는 이민생계방편의 하나였던 비디오 대여업은 3~4년전부터 급격히 어려움을 겪어오고 있다. 전국적으로 750여개에 달하던 대여업소 수는 지난 2년사이 130여개가 문을 닫는 상황에 이르렀다. 적게는 몇만달러에서,많게는 1백만달러에 육박하는 권리금이 형성될만큼 인기비즈니스였던 비디오대여업소들이 불과 몇년 사이 이러한 어려움을 겪게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의 방송 3사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유일한 상품인 비디오 대여업소 입장에서는 프로그램의 희소성이 운영의 관건이다. 매달 3,100달러가 넘는 프로그램구입비용의 가치 또한 희소성에 기반한다. 인벤토리 가치가 제로에 가까운, 참으로 특이한 형태의 비즈니스이다. 생계를 위해 수십만 달러의 권리금을 지불했던 것도 희소성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방송 인프라가 채 구축되기 전 희소성의 가치로 무장한 한국의 문화 콘텐츠를 실어나르는 첨병 역할을 해온 주인공은 바로 비디오 대여업소들이다. 그들 덕분에 한국의 방송 3사들은 케이블이다, 위성TV다 하는 방식으로 앞다퉈 미국에 진출, 오늘날의 위치를 갖게 됐다.

방송 3사가 직접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은 비디오 대여업자들로서는 치명적인 상황이다. 업소 운영의 관건인 프로그램 희소성의 가치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여업계가 프로그램 제공자들인 방송 3사에게 얻어낸 게 이른바 홀드백(시차방영)이다. 특정 프로그램을 방송사들이 직접 방영하는 시기 보다 다만 몇주라도 빠르게 보급할 수 있어야 대여업계는 유일한 경쟁력인 희소성을 그나마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홀드백은 생계의 방편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 홀드백 기간은 해가 갈수록 짧아지더니 급기야 오락 쇼 프로그램 6주,드라마 8주로 오그라 들었다. 20여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비디오 대여업계가 양보한 마지노선이 그것이다. 유일무이한 상품가치인 그 희소성을 위한 절박한 호소가 담긴 생명선이다.

그 홀드백 기간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더니 급기야 KBS아메리카는 대여업소에 공급한 프로그램 안에 자기네가 구축한 직접방영 채널을 광고하는 황당하고 몰염치한 행위까지 주저없이 벌이고 있다.프로그램을 대여업소에서 빌려보지 말고 케이블이나 위성TV 시청을 통해 접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 광고는 매달 프로그램 콘텐츠료로 60만달러씩을 가져다주는 대여업소를 고사시키겠다는 몰상식한 작심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공영방송이 상도의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본양식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꼴이다. 그러니 중년의 대여업주들이 어찌 시위 피켓을 집어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광고까지 해대면서 무료가입자를 모객하는 프로그램 불법 제공사이트를 방치하면서도 영세한 대여업자들에게 원본료 독촉은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는 방송사들이다. 렌트비와 프로그램 구입비용,테입 구입, 인건비 등 8,000~2만달러에 달하는 월 고정비용은 요즘 비디오 대여업소들을 휘청거리게 하는 무거운 짐이다. 거기에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하는 불법사이트를 감당하기에도 숨이 턱에 차오르는 데 이제 방송사가 대놓고 대여업계를 찾는 고객들의 발길을 돌리라고 광고까지 해대는 판국을 그저 눈감고 참아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비디오대여업소를 운영하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거대 방송사를 상대로 케이블이나 위성에 진출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일 만큼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예전같이 3개월도 아니고 6~8주에 불과한 홀드백 기간이나마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 뿐이다.거기에 서면약속이라도 해주면 감지덕지하다는 게 그날 시위에 나선 업주들의 소박한 요구이다.

한류콘텐츠의 세계화가 방송 3사를 앞세운 국가적 시책이니 비디오 대여업소들이 대세에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뜻이라면 보상책을 세워줘야 한다. 소리없이 그저 서서히 죽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안정적으로 확보해온 연 2천만달러의 수입원(시장)에 대한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방송 3사와 비디오협회가 공동 단속반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불법 콘텐츠 유통을 막아보자는 비디오 업계의 대안도 있었다. 홀드백만큼은 가게 한 곳 한곳이 피와 땀을 짜내며 벌어들이는 생계비의 유일한 원천이니 지켜주십사하는 탄원도 했다.비디오대여업계는 종업원과 관련업자들을 포함하면 1만여명이 목을 걸고 있다. 이미 20%는 버티다 못해 파산했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희망을 줄 수는 없는 것인가.

윤성운/타워비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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