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정식으로 취임한 마당에 새삼스럽게 BBK특검을 왈가왈부하려는 건 아니다. 정호영 특검팀이 지난 21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던 자리에서 터져 나왔던 말 한마디가 며칠이 지나도록 가슴 속에서 응어리진 채 사라질 기미가 없다.
뭔가 넋두리라도 하지 않으면 속병으로 곪아버릴 듯하다. 그날 문강배라는 판사출신 특검보는 BBK사건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서 “검은 머리 외국인에게 대한민국이 우롱당한 사건”이라고 단호하게 결론지었다.
가슴을 움켜쥔 채 졸도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을까. 급기야 눈물이 핑돌 지경이었던 것은 미국, 아니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한결같은 느낌이었으리라.
모국의 최고권력기관 중 한 곳이라는 특별검사팀이다. 온 나라가 이목을 집중하고 있던 기자회견장이었다. 그런 곳, 그런 자리에서 국어사전에도 없는 막말이 공식적인 결론을 내리는 용어로 사용됐다.
정권이양의 막바지 순간까지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질리게 들었던 막말이 그런 식으로 또 곁가지를 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한국의 신문과 방송 등 온갖 종류의 미디어들은 문강배 특검보의 표현이 절묘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모두들 하나같이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어구를 헤드라인으로 뽑아댔다. 털끝만큼이라도 차별적인 표현이면 수정해야 마땅할 언론들이다. 표현의 재미에 가려 700만 재외동포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건 왜 생각하지 못했는지 도무지 그것이 궁금하다.
이건 집단 폭력이나 다름없다. 사법과 언론이라면 나라의 절반 이상을 호령하는 분야이다. 대한민국의 5할 이상이 잠재의식 속에 재외동포를 비아냥댈 수 있는 대상으로 감춰두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머리끝이 쭈뼛거리고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다.
지난해 12월 15일 조선일보의 <송희영 칼럼>에서는 ‘김경준과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라는 제목을 다뤘다. 경제통인 송씨는 “검은 머리 외국인이란 한국의 기관 투자자나 대주주, 그리고 큰손 투자자들이 버진 아일랜드나 말레이시아 라부안처럼 세금을 내지 않는 곳에 역외(域外)펀드를 만들어 국내 증권에 투자하는 가짜 외국인 투자자를 통칭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문 특검보는 어쩌면 송 위원의 칼럼을 기억해두고 있다가 인용해 발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조갑제라는 한국사회의 극우 보수 논객이 표현을 문제 삼아 목청을 높였을 때 해명했을 법한데 조용했다. 특검팀 김학근 공보관은 “발언 강도가 너무 세다고 생각했지만 결과가 발표된 뒤라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라며 오히려 문 특검보를 두둔할 뿐이었다.
비판이든 비난이든 건수만 걸렸다 싶으면 개나 소나 짖어대는 꼴로 나서던 한국 사회의 유수한 칼럼니스트들은 어찌된 셈인지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망언만큼은 곱게 내버려두고 있다. 아무도 문 특검보의 망언이 실언이었는지 뭐였는지 가리려고 하지 않는 현실은 참으로 절망적이다.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단단히 따지고 오겠다던 LA 한인사회 유력인사들이 어떤 성과를 갖고 올지 두고볼 일이다. 그들마저 그냥 덮고 돌아오면 어쩌나 싶다. 새 대통령이 취임식 전날 동포들 모임에 얼굴을 비춰준 게 그저 황송하고 망극해서 말이다.
남의 나라에 옮겨와 살면서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로 가득 찬 일상에 지쳐 있는 해외동포들이다. 터잡고 사는 곳에서 어떡하든 기펴고 살려고 피땀 흘린다. 그 과정에서 몰리고 또 서러워도 언제든 ‘한국인’이라는 숨결로 보듬어주는 그 장엄한 연대감은 늘 위안거리였다.
이제 느닷없이 등이 시렵고 또 시렵다. 우리 동포들은 그저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분류코드를 갖고 있을 뿐 아닌가.
황덕준/미주판 대표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