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경향신문은 한국의 민주화 20주년을 계기로 기획한 특집으로 정치권력과 지식인의 관련성을 진단했다. 그때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부 때부터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입각했던 862명 가운데 대학교수나 강사, 연구원, 언론인 등 이른바 지식인 출신이 21.1% 인 182명이었다.
그 기준으로 어제 발표된 이명박 정부에 들어설 총리와 장관 내정자들 16명의 출신성분을 살펴보니 지식인 계층에서 발탁된 인물이 6명으로 37.5% 에 이른다. 역대 정부에서 입각한 지식인 출신 비율보다 훨씬 높은 셈이다.
새 정부는 경제살리기를 구호로 외치면서 실용과 전문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명박 당선인은 여러차례에 걸쳐 정치인이나 관료주의에 빠진 행정가보다 전문분야의 학자 등을 중용하겠다고 해왔다. 그런 만큼 지식인 출신 각료의 비율이 높다고 해서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전문 관료인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를 제치고 행정부 각 부처의 사령탑에 앉은 교수출신들을 가리켜 폴리페서라 부르기도 한다.폴리틱스(politics)와 프로페서(professor)를 합성한 조어다.대개 부정적인 뜻으로 비아냥거릴 때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전문지식을 현실과 현장에 적용하는 일이기에 굳이 비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정책을 운용하는 행정가로 참여하는 것은 권력의 맛에 취한 정치지향적 학자의 오염과 구분할 만하다.
폴리페서와 같은 방식으로 조합한 폴리널리스트라는 말도 나돈다.폴리틱과 저널리스트를 섞은 것이다. 오는 4월 9일 치러질 한국의 18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40명이 넘는 언론인 출신들이 각당의 공천 경쟁에 나서고 있다. 늘 그랬지만 이번에도 말들이 많다.
16대 국회에서 언론인 출신은 전체 271명 가운데 47명으로 17.5% 였다. 17대에서는 전체 297명 가운데 42명으로 15.4% 를 차지했다. 10여년전 만해도 정계로 나가는 언론인들은 상당히 눈치를 봐야 했다. 요즘은 아예 대놓고 나선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하기야 지난해 한국언론재단에서 발행하는 월간 <신문과 방송>에서 언론계에 막 발들여 놓은 신입기자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무려 63.3% 가 언론인의 정계진출에 관대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언론인들은 사회 어느 분야보다 기성 정치적 파워집단과 물리적 정서적으로 지근거리에 위치한다. 그만큼 정치적 신인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스카우트 가시권에 있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현실이 그렇다면 언론인의 정치인 변신을 용인해야 할 것인가.
굴곡 심한 한국 현대사를 감안할 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기자생활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건국초기의 정치인들이나 5공화국 시대의 강제해직으로 어쩔 수 없이 정계에 발 들여 놓은 여러 언론계 출신들은 예외로 하자.
그게 아니라면 정치인으로 직업을 전환할 때는 원칙적으로 언론 현직을 상당기간 떠나 있은 뒤, 그러니까 유예기간을 둬야 한다고 본다. 현역 시절 불공정과 편파성, 주관성 있는 언론 활동을 했겠다는 의혹에서 웬만큼 벗어날 만한 거리를 확보할 기간 동안 정신을 탈색하고 의식을 세탁해야 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요즘 언론은 예전만큼 신뢰를 주지 못하는 듯하다. 언론인이란 직업 자체도 별로 존경받거나 존중되지 않는다. 언론의 본령과 원칙을 지키기엔 일상 생존의 논리가 워낙 강력한 탓에 타협을 체질화하다 보니 그리 됐을 것이다.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정치권력을 취하는 발판으로 언론이 아직은 괜찮은 간판이라면, 그건 ‘본령과 원칙’의 가치가 미약하나마 소중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 변신의 유예기간은 그 가치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시간일 뿐이다.
황덕준/미주판 대표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