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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임무는 에드 로이스 연방의원의 정책보좌관으로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이를 반영하는 입법활동을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한인으로서 한국과 미주 한인사회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미국 정계의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로 불리는 에드 로이스 연방하원의원(캘리포니아 39지구·공화당)의 의정활동 핵심 브레인이며 최고참 보좌관인 영 김씨의 말이다.
연방 의회에서도 알아주는 ‘아시아통’ 전문 보좌관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씨는 1990년 주 상원의원 시절의 에드 로이스 의원을 만나 1992년 연방 하원의원 초선때부터 지난해 11선에 당선되기까지 22년간의 긴 세월을 함께 하고 있다.
미국 정계의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로 불리는 에드 로이스 연방하원의원(캘리포니아 39지구·공화당)의 의정활동 핵심 브레인이며 최고참 보좌관인 영 김씨의 말이다.
연방 의회에서도 알아주는 ‘아시아통’ 전문 보좌관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씨는 1990년 주 상원의원 시절의 에드 로이스 의원을 만나 1992년 연방 하원의원 초선때부터 지난해 11선에 당선되기까지 22년간의 긴 세월을 함께 하고 있다.
에드 로이스 의원과 가깝게 지내던 남편이 한인동포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전 한미연합회 전국회장 촬스 김씨다.
“둘째 아이를 낳은 뒤 잠시 회계사 일을 놓고 있던 중 남편이 정치인 보좌관으로 한번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뜻을 물었고, 로이스 의원에게 나를 소개해 함께 일하기 시작한 게 어느덧 20년을 넘겼네요”
이후 11선 중진의원이 되기까지 에드 로이스 의원은 독도영유권, 한미 FTA, 한국인 무비자 입국 , 종군위안부 결의안 등 한국과 관련된 굵직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연방의회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뜻을 잘 반영하고 대변하며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탈북자 강제 송환 중단 결의안’(2007년)과 ‘종군위안부 결의안’(2007년), ‘한미동맹관계 발전 결의안’(2010년) 등에 이어 얼마전인 1월 14일 오바마 대통령이 극적으로 서명함으로써 공식 발효된 ‘북한 어린이 복지법안(North Korean Child Welfare Act of 2012. HR1464)’도 모두 김 보좌관의 조언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0년 이후 연방 의회 내에 단 한명의 한국계 의원도 없는 현실에서 반갑지 않을 수 없고, 그 곁에 김 보좌관이 있다는 사실은 한인사회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웃음) 초등학교때 미국으로 와서 이곳에서 자랐지만 내가 한인이라는 자부심은 항상 있었지요. 한국과 미국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내가 가진 정보와 지식을 전했고 동아시아, 특히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로이스 의원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이스 의원은 의회에서 아시아 문제, 한국동맹관계, 북한 인권문제 전문가로 명성을 쌓으며 ‘코리아 코커스’ 공동의장, 한미 의원연맹 미국 대표, 탈북자를 위한 국제의원연맹 공동의장 등을 맡아왔다. 또 지난해 12월 하원 외교위원장으로 선출돼 의회안에서 입지를 굳게 다졌다.
김 보좌관은 “22년간 보좌관으로서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며 잠시 감회에 젖는다.
“집과 워싱턴을 오가며 일했던 날들이 생각나네요. 그때는 아이들도 어렸는데 가족의 도움과 응원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특히 많이 이해해 주고 도와준 남편이 있어서 가능했지요”
1남 3녀, 4명의 아이를 길러낸 ‘열혈엄마’인 김 보좌관은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족예배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둘째 아이를 낳은 뒤 잠시 회계사 일을 놓고 있던 중 남편이 정치인 보좌관으로 한번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뜻을 물었고, 로이스 의원에게 나를 소개해 함께 일하기 시작한 게 어느덧 20년을 넘겼네요”
이후 11선 중진의원이 되기까지 에드 로이스 의원은 독도영유권, 한미 FTA, 한국인 무비자 입국 , 종군위안부 결의안 등 한국과 관련된 굵직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연방의회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뜻을 잘 반영하고 대변하며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탈북자 강제 송환 중단 결의안’(2007년)과 ‘종군위안부 결의안’(2007년), ‘한미동맹관계 발전 결의안’(2010년) 등에 이어 얼마전인 1월 14일 오바마 대통령이 극적으로 서명함으로써 공식 발효된 ‘북한 어린이 복지법안(North Korean Child Welfare Act of 2012. HR1464)’도 모두 김 보좌관의 조언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0년 이후 연방 의회 내에 단 한명의 한국계 의원도 없는 현실에서 반갑지 않을 수 없고, 그 곁에 김 보좌관이 있다는 사실은 한인사회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웃음) 초등학교때 미국으로 와서 이곳에서 자랐지만 내가 한인이라는 자부심은 항상 있었지요. 한국과 미국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내가 가진 정보와 지식을 전했고 동아시아, 특히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로이스 의원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이스 의원은 의회에서 아시아 문제, 한국동맹관계, 북한 인권문제 전문가로 명성을 쌓으며 ‘코리아 코커스’ 공동의장, 한미 의원연맹 미국 대표, 탈북자를 위한 국제의원연맹 공동의장 등을 맡아왔다. 또 지난해 12월 하원 외교위원장으로 선출돼 의회안에서 입지를 굳게 다졌다.
김 보좌관은 “22년간 보좌관으로서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며 잠시 감회에 젖는다.
“집과 워싱턴을 오가며 일했던 날들이 생각나네요. 그때는 아이들도 어렸는데 가족의 도움과 응원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특히 많이 이해해 주고 도와준 남편이 있어서 가능했지요”
1남 3녀, 4명의 아이를 길러낸 ‘열혈엄마’인 김 보좌관은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족예배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둘째 딸 혜인이는 현재 워싱톤 DC에서 연방정부 부처의 펠로우로 일하고 있으며, 풀러튼 트로이 고등학교 졸업반인 셋째딸 혜나는 엄마처럼 회계학을 공부하고 싶어한다.
김 보좌관은 많은 한인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최연소 한인 시의원에 당선된 라팔마 시의회의 피터 김 시의원도 고등학교 시절 김 보좌관 밑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 김 보좌관은 젊은 학생들을 만나면 어디서나 조언을 아끼지 않고 특히 여성의 새로운 도전을 격려한다.
“내가 회계사에서 정치인 보좌관이라는 전혀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여자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황에 따라 커리어 패턴을 바꾸기 쉽지 않을까요. 또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것도 여성들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봐요”
김 보좌관의 좌우명은 ‘실수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 가라’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어떻게 그 일을 다 했느냐는 것이지요. 그동안 내가 한 실수들을 다 고백한다면…(웃음). 실수를 했기 때문에 더 낫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고 봐요. 저지른 실수를 계속 곱씹을 필요가 없어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하혜연 기자
김 보좌관은 많은 한인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최연소 한인 시의원에 당선된 라팔마 시의회의 피터 김 시의원도 고등학교 시절 김 보좌관 밑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 김 보좌관은 젊은 학생들을 만나면 어디서나 조언을 아끼지 않고 특히 여성의 새로운 도전을 격려한다.
“내가 회계사에서 정치인 보좌관이라는 전혀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여자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황에 따라 커리어 패턴을 바꾸기 쉽지 않을까요. 또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것도 여성들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봐요”
김 보좌관의 좌우명은 ‘실수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 가라’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어떻게 그 일을 다 했느냐는 것이지요. 그동안 내가 한 실수들을 다 고백한다면…(웃음). 실수를 했기 때문에 더 낫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고 봐요. 저지른 실수를 계속 곱씹을 필요가 없어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하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