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하고 못한 것들…그, 소소한 재미

리얼 버라이어티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캐릭터를 만들고 상황을 설정한다. 이 식상함을 떨치면서 나온 게 다큐예능 또는 관찰예능이다. ‘진짜 사나이’ ‘나 혼자 산다’ ‘인간의 조건’이 대표적이다. 이들 프로그램은 주어진 현실에 자연스럽게 부딪히며 나오는 반응을 보는 것이다. 이 중에서 KBS ‘인간의 조건’은 소소한 재미와 함께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며 공영방송에 어울리는 예능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인간의 조건’의 출발점은 이렇다. 우리는 갈수록 쉽고 빠르고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이렇게 빠르고 쉽게 사느라 혹시 놓치는 것은 없는지,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현대인의 필수조건을 하나씩 가감함으로써 느껴보자는 것이다. 김준호 박성호 김준현 양상국 허경환 정태호 등 6명의 친근한 개그맨들이 시청자를 대신해 일주일 동안 체험하면서 생활 패턴과 의식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센 아이템을 사용한 후 방향을 찾았다=‘인간의 조건’ 같은 착한 예능의 딜레마는 재미를 어떻게 뽑아내느냐다. 소소하게 그대로 보여주면 밋밋하다고 하고, 독한 상황에 집어넣으면 자극적이라고 한다. 차인표가 진행한 ‘땡큐’는 3, 4명의 출연자가 함께 여행하면서 나누는 자유스러운 대화 속에서 고민과 속내, 일상을 보여주며 교감하는 좋은 예능이었지만 조기 종영된 것은 그런 이유다.


‘인간의 조건’도 초기에는 센 아이템을 사용했다. ‘쓰레기 없이 살기’ ‘자동차 없이 살기’ ‘돈 없이 살기’ ‘물ㆍ전기 없이 살기’ 등은 너무 불편한 생활이 동반돼 그 자체만으로도 쓸 만한 그림이 됐다. 정말 소중해 고마움을 못 느끼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된 문명의 이기들은 그것이 없을 때 비로소 소중함의 진가를 발휘한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 중 계속 하나씩을 빼내는 생활만으로 ‘인간의 조건’을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센 아이템은 모두 썼다. 이제는 센 아이템이 아니라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을 얻었다. ‘진짜 친구 찾기’ ‘이웃의 도움으로만 살기’ 편을 하면서 두루뭉술한 주제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이템의 확장 가능성을 봤다.”

신미진 PD의 얘기다. 그는 “10년 전 문법으로 재밌게 하려면 일부러 독한 미션을 주고, 경쟁 서바이벌 체제를 만드는 것”이라면서 “하지만 ‘인간의 조건’은 큰 주제가 있어 경쟁이 없어도, 큰 예능적인 재미를 주지 않아도 된다. 개그맨이 재밌게 해줄 거라고 믿고 맡긴다”고 했다.


▶‘이웃의 도움으로만 살기’는 최고 성공작=최근 방송된 ‘이웃의 도움으로만 살기’는 처음에는 우려한 아이템이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잘 풀렸다. 소재의 한계를 극복해준 아이템이었다. 멤버들이 이웃들에게 다가간 것은 시청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모습이다.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는 사실은 알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게 되는 이웃에게 말을 걸기도 쉽지 않다. 낯을 가리는 김준현과 정태호는 미션 수행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울 연남동 이웃과 친해지는 첫 번째 방법으로 인사하기를 실천하고, 이웃사람과 함께하는 한마음잔치를 열어주고 자신들이 담근 김치를 선물하면서 서로의 거리와 벽은 무너져갔다. 이웃들은 반찬과 먹을거리를 개그맨의 숙소에 직접 가져왔다. 김준호는 바로 앞집에 있는 홍민이 집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김준호는 이 집에서 가족의 정을 느꼈고, 대리부모님 느낌이 날 정도로 따뜻했다고 털어놨다. 이 집 아들 대학생 홍민 군이 조카로 느껴졌다고 했다. ‘촌놈’ 양상국은 처음으로 서울에서 이웃집의 밥을 얻어먹었다. 체험 후 “먼저 다가가야 한다”(김준현), “나를 열면 이웃과 가까워질 수 있다”(허경환), “이걸 안 했다면 좋은 사람들을 놓칠 뻔했다”(양상국) 등의 소감을 내놨다.

이 밖에도 ‘책 읽으며 살기’에서 ‘세 시간 책읽기’를 실천하고 책 속의 명소를 찾아가는 모습 등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딱딱한 아이템을 부드럽게 만드는 건 개그맨 몫 =자칫 딱딱할 수도 있는 ‘인간의 조건’ 아이템들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건 여섯 개그맨의 몫이다. 이들은 제각각이다. 박성호와 김준호의 사적인 불화는 그대로 방송됐다. 두 사람은 홍대 앞에 물건을 팔러 갔다가 진짜 싸웠다고 한다. 방송에서는 편집으로 수위를 낮췄다. 하지만 실제의 모습이라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박성호는 “초기 휴대전화와 물 없이 지내기 미션에서는 내 포지션을 못 찾았다. 나는 민얼굴로 방송하면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준호와의 불화는 지극히 사적인 것인데 이걸 방송에서 썼다”면서 “합숙하면서 서로 친해지니까 나의 이상한 행동도 자연스럽게 받아줬다. 특히 (정)태호가 나를 많이 이끌어줬다”고 전했다. 이어 박성호는 “당일 기획한 해외여행으로 혼자 갔던 티니언에서의 두려움은 아무 계획 없이 인생에 남겨진 추억”이라고 털어놨다.

김준호는 “체험 주제는 같지만 접근 방법은 모두 다르다. 나는 친구를 되돌아보고, 성호 형과도 화해하며, 일주일간 술 안 먹고 건전하게 생활한다. 정을 줄 사람은 많은데, 그동안 소홀히 했다. 나에게는 힐링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양상국도 “살아온 방식이 다 다르니까 친구를 찾을 때도 모두 저마다의 모습이 나왔다”고 말했다. 양상국은 초반 지렁이가 쓰레기를 흡수한다는 사실을 찾아내 미션해결사로 떴다. 하지만 선배들은 양상국은 착한 면만 있는 게 아니라 상남자의 모습, 외제차도 좋아하고 서울문화를 누리려는 모습, 여자친구를 좋아하는 모습 등 다면적이라고 했다. 양상국도 “지렁이는 얻어걸린 것”이라면서 “사람들이 저를 착하게 보시니 변신이 어렵다. 이제 준호 형의 영향을 받아 악인이 되겠다”고 했다.

김준현은 “친구 찾기 미션 같은 것은 실제로 술을 먹고 했으면 좋겠다. 그게 리얼이니까”라고 했고, 정태호는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리얼스럽게 행동한다. 방송임을 잊는 순간이 리얼로 들어가는 시점”이라면서 “ ‘인간의 조건’은 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답을 찾아나가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했다.

이들과의 인터뷰는 가식과 꾸밈이 없다. 우두머리를 꿈꾸는 김준호는 “경환이가 대중교통 수단이 끊어져 차를 타고 온 것에 대해 심하게 이야기한 것도 내 모습이다. 박성호 같은 개인주의 선배도 인정한다. 나는 ‘귀여운 자폐’라고 할까. 서로 인정하고 공존을 터득했다. 우리는 좀 더 싸워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