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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한국남자로 산다는 것? 차라리 묻지 마세요”
뼈 속까지 한국남자인줄만 알았던 그가, 아침 점심 저녁 삼시세끼 뜨거운 국물 없이는 밥상을 거부하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앞치마를 두르기 시작했고 저녁으로 햄버거도 용납한다.
1차 2차 3차도 모자라 술친구들을 대동하고 새벽 한 두 시에 들이닥치던 그는 이제 집밖에 모르는 ‘착한 남편’이 되었고 주말이면 군말 없이 아이 야구시합에 따라가주는 ‘자상한 아빠’가 됐다. 심지어 일요일엔 교회도 간다.
할렐루야. 우리남편이 달라졌어요! 아내들은 전화통을 붙들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는다. “역시 미국에 오길 잘했어. 완전히 가정적인 남자가 됐어. 우린 너무너무 행복해”
궁금했다. 과연 남편들도 그녀들만큼 행복할까?
어바인에 사는 조 모씨(43. 보험에이전트)는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남편이다.
맞벌이를 하는 아내와 함께 가사와 육아를 분담한다. 출근길 아이들 등교와 청소는 조씨 담당, 하지만 수시로 세탁기도 돌리고 설거지도 한다. 주말골프도 조씨에겐 남얘기다.
여성들이 많은 사무실에서도 ‘젠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행여 여직원들에게 찍히면 업무에 차질이 오기 때문에 항상 조심조심이다. ‘착한 남자’로 살아온 지 십 수년. 솔직히 숨이 턱까지 차온 지 오래다.
조씨는 “행복? 가족의 행복에 의미를 둘 뿐 솔직히 내 행복은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 갈등이 되니까 안 하는 것일 뿐, 아마 일탈을 꿈꾸지 않는 남자는 없을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이름대면 알만한 타운의 한인기업에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민 13년 차 김국장의 표현은 좀더 노골적이다.
“LA에서 한국남자로 산다는 것? 남편권위, 애비권위, 통장권위 다 무너졌다. 차 때문에 술도 못 먹고 오매불망 마누라 얼굴만 보고 사니 절간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 매일 청소하고 쓰레기 버리고 아이 픽업하고 차라리 조선시대 종놈이라 불러달라. 미용실에서 머리 깍고 아줌마들하고 드라마 얘기하는 게 낙이다. 이러다 아줌마 되는 건지 싶다. LA한인타운이면 한국과 뭐가 다르냐고? 얼마나 좁은 동네인데 까딱하면 소문나기 십상이다. 젊은 애들 아니면 누가 타운에서 노나”
지난 5년 간 안 팔아 본 것이 없는 만년 세일즈맨 김모씨(48)는 요즘 생각이란 걸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한국에서 잘나가는 증권회사에 다녔다는 것, 미국에 와서 벌인 사업에 실패한 것, 문전박대를 당하는 세일즈맨으로 산다는 것… 생각하면 울화만 치미니 그저 사는 것이다. 웨이츄레스를 하는 아내벌이가 나보다 나은 것도 그냥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프리웨이에서 그렇게 졸릴 수가 없다. 졸음 때문에 위험한 적도 몇 번 있었는데 그럴 때는 작은 생명보험이라도 하나 들어놓은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될 때도 있다”
미국은 남자가, 더구나 한국남자가 살아가기는 참 퍽퍽한 곳이다.
특히 이삼십 대를 한국에서 보낸 사오십 대 중년 가장들에게는 미국은 ‘여자와 아이와 강아지의 천국일 뿐’이다. 집과 회사의 무한반복, 여가시간의 대부분은 부부동반 모임이나 종교활동 등으로 지극히 제한된다. 퇴근 후 만나는 반가운 술친구도, 설움을 달래줄 포장마차도, 고민을 잠재우던 담배 한 가치의 여유도 없다.
모범남편 이씨와 투덜이 김국장, 피곤한 김씨에게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일탈의 공간만이 아쉬운 것이 아니다. 공감부족, 이해부족, 배려부족, 격려 ‘절대’ 부족이다.
퇴근길 꽉 막힌 도로 혹은 프리웨이 한 가운데서 팜트리와 영어 이정표가 유난히 낯설게 보일 때, 저 밑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오기도 하지만 이들은 울지 못한다. 태어나 딱 세 번만 울어야 하는 ‘한국 남자’니까.
한미가정상담소에 따르면 최근 상담소의 한인남성 상담률이 대폭 늘어나 50%에 육박하고 있다
고 한다. 놀라운 숫자다. 여성들의 고민은 대체로 가정폭력이나 경제문제 등 외부적 요인인데 비
해 남성들은 심리적인 문제가 다수를 차지한다고.
상담소측은 “경제적 문제보다는 중년 이후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회의와 정체성 혼란, 추락
하는 자존감 문제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그 중 가장 상처가 되는 것이 아내와 자식들로 받
는 모멸감이다”라고 전한다.
한미가정상담소 수잔 최 변호사는 “여성에 비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약한 남성들에게 이민은
큰 스트레스다. 사회, 문화, 언어 적응력도 여성들이 앞선다. 미주 한인사회는 남성의 역할이나 활
동반경, 관계의 범위가 한국에 비해 작을 수 밖에 없는데 남성들은 이를 자신의 가치축소로 받아
들이기 쉽다”고 설명한다.
남편이 지나치게 말수가 적어지거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사람들 만나기를 기피한다면
그것은 가족들의 관심과 격려가 필요한 때라고 조언한다.
지난 주간 안팎으로 마주치는 남자들마다 묻고 다녔다.
“미국에 한국남자로 산다는 건 어때요?”
아, 이토록 절절할 줄이야.
마감이고 뭐고 오늘을 일찍 들어가 남편을 위해 된장찌개라도 바글바글 끊여야겠다.
<LA 진짜 싸나이>
아침밥상 또시리얼 뜨건국물 먹고프다
아내눈치 아임OK 서두르자 지각할라
사장눈치 실적저조 이번달도 노커미션
안팔린게 내탓이냐 오바타임 언제주나
주부사원 미세스김 이번달도 영업1등
배아파도 보험없어 병원한번 못가누나
퇴근하니 자식놈들 지들끼리 쏠라쏠라
한국에선 잘나갔다 영어갖고 무시마라
페이먼트 다가오나 마눌짜증 오늘최고
알고보니 옆집여자 루이비똥 신상구입
소주한잔 생각나도 갈데없고 친구없다
서러워도 우지말자 아직까진 남자니까
하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