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모술수에 능한 이인임
기득권과 개혁세력 힘겨루기
현실감 있는 캐릭터간의 갈등
백성을 위한 정치 행보
현실 정치에 던지는 메시지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다. 그렇게 해서 사회적 갈등을 완화시키는 작업이다. 정치인들은 모두 그런 일을 한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요즘은 서민들의 생활고를 해결해줄 민생정치에 귀기울이겠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정치는 국민에게 그런 부분을 제대로 긁어주지 못하고 있다. 정치불신 내지 정치실망의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정치에의 갈망은 항상 숙제로 제시된다.
KBS 정통사극 ‘정도전’은 진짜 국민을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시대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격변기요, 난세다. 권문세족은 여전히 부를 독차지하고 사병을 거느리며 도탄에 빠진 백성을 외면한다. 왜구의 침입으로 백성의 삶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썩을 놈의 고려. 나 힘들어서 고려 백성 못하겄소”라는 마을 아낙네의 외침이 들려온다.
이에 성리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이상과 정치이념을 들고나오는 신진사대부가 있다. 신진사대부를 대표하는 인물인 정도전(조재현)은 과격한 행동파 인물로 나온다. 권모술수에 능한 이인임(박영규)에 반기를 들다 나주로 귀양을 갔다. 어느 시대건 기득권 집단과 이의 모순을 지적하며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는 집단은 서로 갈등을 빚게 마련이다.
정도전은 수문하시중 이인임의 노회한 전략에 말려 번번이 고전한다. 정치란 이상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현실정치와 기득권의 정점에 있는 ‘넘사벽’ 이인임은 현실정치 9단이다. 이용할 수 있는 세력은 모두 이용한다. 최영(서인석)을 놔두는 것은 백성의 신망을 받고 있기 때문이며, 정도전을 완전히 복권시키지 않고 이성계(유동근)를 영흥의 변방에 놔둔 것은 자신에게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인임이 자신의 조카사위이자 신진사대부인 하륜(이광기)에게 “내가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적과 도구라는 두 부류의 사람만 있다고 했지. 삼봉(정도전)은 도구가 아니라 적이다. 가혹한 게 아니라 경계하는 걸세”라고 말한다. 이인임은 이성계에게도 “선대 조상들이 원나라의 벼슬을 받았는데, 고려인이 맞냐”며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이인임은 백성의 신뢰를 얻지는 못하지만 북원과 결탁해 힘을 유지하고, 백성이 좋아하는 최영을 끌어들여 정도전을 쳐낸다. 파워게임, 정치공학에 능한 인물이다. ‘정도전’이 재미있는 것은 이인임을 맡은 박영규의 연기가 절제돼 있기 때문이다. 박영규의 연기는 시트콤에서 트로트를 부르는 코믹한 중년 아저씨가 아니다. 고도의 권모술수로 명덕태후와 우왕을 무력화시킨다.
‘정도전’에서 캐릭터들 간의 부딪힘은 마치 살아있는 현 정치를 보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준다. |
최영은 우직하고, 이인임은 권력 게임에 능하다. 정도전은 기존의 질서를 개편하려는 아이디어는 있지만 현실적인 힘이 떨어진다. 캐릭터들이 모두 현실감이 있다. 이들을 보고 있으면 요즘 정치를 그대로 바라보는 듯하다. 이들이 벌이는 파워게임은 현재 살아있는 정치 같다.
신진사대부 내에도 정도전의 이상을 돕는 막역지우 정몽준(임충)이나 지조와 절개를 목숨처럼 여기는 박상충(김승욱) 같은 인물도 있지만 “바람이 불어오니 나무야 흔들릴 수밖에”라며 이인임에 붙는 염흥방 같은 인물도 있다.
사실 사극은 과거를 빌려 현재를 이야기하기에 가장 좋은 장르다. ‘정도전’이 마치 우리의 현 정치를 보는 것 같아 집필하고 있는 작가에 대해 물어봤더니,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라고 한다. 정현민 작가는 최수종이 대통령으로 나왔던 ‘프레지던트’에도 공동 집필자로 참가한 경력이 있다.
정도전은 여러 시행착오 끝에 이상(성리학)과 현실(정치)을 더 잘 알게 되고 이성계를 만나 조선을 열고 새로운 국가의 시스템을 만든다.
‘정도전’에서는 정도전이 새로운 이상과 시스템을 갖춘 국가를 열기 전 민초들의 힘든 삶을 목도한 사실이 중요하다. 유배된 나주의 부곡마을에서의 생활을 통해 고려 말 백성들이 자신은 굶주려도 부패한 관료들에 조세를 바쳐야 하는 힘든 생활상을 보여주었다. 나주 유배지에서 만난 민초들 앞에서 정의를 외쳤지만 상황은 도리어 악화됐다. 정도전은 ‘맹자’ 책을 지니고 다니지만 아직은 “거짓말만 배우고 가르친 밥버러지일 뿐이오”라고 말한다.
정도전은 고려의 실상을 민초들의 삶을 통해 접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울었다. 법과 규칙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정도전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절감했을 것이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기 위한 행보는 지금 정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이 과정이 앞으로의 ‘정도전’임팩트를 결정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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