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 읽고 영화출연 결심했죠”

사랑하는 사람 잃고 아파하는 役
도저히 상상 안가 처음엔 출연거절
때마침 만난 책 읽고 결심 바꿔

김희애 · 김혜수 · 틸다 스윈튼 같은
견고한 내적평화를 가진 사람 되고파


영화 ‘우아한 거짓말’(감독 이한)에서 배우 고아성(22)은 무표정의 슬픔을 보여준다. 그것은 십대의 소녀가 자꾸 바깥으로 삐질 삐질 새나올 것 같은 눈물을 세상에 내보이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자, 슬픔 그 자체가 딱딱한 껍질처럼 굳어져 이룬 완강한 방어막이기도 하다. 함께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던 어리고 약했던 여동생의 자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열 몇 살 소녀의, 어쩌면 치기 섞인 자존심은 슬픔을 내보이는 것도, 과잉된 웃음을 짓는 일도 허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히 김려령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하자면, ‘완득이’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낙관성으로, ‘우아한 거짓말’의 ‘만지’(고아성 분)는 언뜻 언뜻 냉소적인 무표정으로 어린 소년 소녀에겐 무지막지할 슬픔을 감당해낸다.

‘우아한 거짓말’은 착하고 조용한 학생이었던 ‘천지’(김향기 분)가 유서를 남기지 않은 자살을 하고 난 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마트에서 일하면서도 주책없을 정도로 씩씩하고 활달한 모습으로 혼자 두 딸을 키워왔던 엄마 ‘현숙’(김희애 분)과 생전 동생이 친하게 지냈던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만지’는 동생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어간다. 유서를 남기지 않는 죽음으로 한 소녀가 엄마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언니인 ‘만지’에게 말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만지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죽은 소녀에 대한 죄책감을 비로소 대면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상실이 가져오는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만지’역의 고아성은 이제 스물 두 살의 여배우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여문 연기 세계를 보여준다.

“지난해 ‘설국열차’의 개봉을 앞두고 출연을 제안받았어요. 시나리오를 보고는 처음에는 못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연기할 때 반드시 경험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역할에 따라서는 상상만으로는, 실제로 느껴보지 않고는 표현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자면 가장 가까운 사람의 상실을 경험하는 것, 진짜배기 사랑을 해보는 것, 아이를 낳아보는 것 같은 일이요. (동생을 잃게 되는 여고생 역의) ‘우아한 거짓말’의 ‘만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출연을 거절하고 일주일의 꿈이 결정을 바꾸게 했다. 극중 감당 못할 상실의 아픔을 꿈에서 고스란히 앓았다.

“일주일 내내 꿈을 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꿈이었죠. 꿈에서 엄마가 죽거나, 오랜 단짝 친구가 죽거나, 언니를 잃었어요. 꿈이지만 그렇게 실제 같고, 구체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다가 이제는 엄마가, 언니가, 친구가 이제는 곁에 없다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는 결심, 그러다가 다시 밀려오는 상실감에 감정이 온통 미궁에 빠지는 순간, 그 모든 과정을 꿈속에서 고스란히 경험했어요.”

그리고 때마침 읽고 있던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가 결정적이었다. 이 책은 프랑스의 문학비평가인 저자가 어머니를 잃고 2년간 쓴 글을 모은 책이다. 고아성은 이한 감독에게 장문의 메일과 전화로 영화 출연의사를 정중히 전했다. 


영화 개봉(13일)을 앞두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고아성은 ‘괴물’의 현서도, ‘설국열차’의 요나도, ‘우아한 거짓말’의 ‘만지’도 모두 자신의 한 구석 어디론가에 살포시 품은 채, 봄날을 맞은 화사하고 영특한 이십대 청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파스텔톤으로 차려입은 옷차림이 밝고 씩씩했으며 들뜨지도 움츠러들지도 않고 나누는 대화법은 영리하고 단단했다. 스물 몇 살 무렵에는 보기 어려운 균형감과 성숙한 사유가 말 속에 그대로 드러났다. 전작 ‘설국열차’를 끝낸 후 근황을 묻는 질문에 고아성은 학교와 일상에 복귀해 지낸 몇 개월의 이야기로 답했다.

“일단은 (영화 촬영 때문에 휴학 후) 복학생 신분이 된 것이 너무 슬펐죠. 저는 개인적인 삶도 중요한 사람이라, 제게는 가족, 친구, 공부 등 일(연기) 외의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이 잘 갖춰져 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영화 때문에 미뤄져 있던 일상을 잘 누렸어요. 아마도 스무살 무렵부터는 개인적인 생활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작품 속에서는 감정의 격한 너울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하는 것이 배우지만, 자연인으로 돌아오면 균형 잡히고 안정되며 성숙한 세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고아성은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왔지만, 마음 속 깊은 곳, 견고한 내적 평화를 가진 사람을 동경해왔던 것 같아요. 김희애나 김혜수 선배님도 그렇고, ‘설국열차’에서 함께했던 틸다 스윈튼도 그런 분들이죠. 저도 그 든든한 마음을 어릴 적부터 찾으려고, 가지려고 노력해왔어요.”

고아성은 열여섯살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 왔다. 독서는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편식하는 편이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들을 좋아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를 ‘최고의 영화’로 치고, 최근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인상적으로, 감동적으로 봤다.

고아성은 ‘설국열차’로 베를린영화제에 갔다가, 홀로 프라하행 비행기를 탔다. ‘설국열차’ 촬영 때 묵었던 곳을 다시 찾아 3박 4일을 지냈다.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며칠간을 객지에서 오롯이 홀로 지낸 것은 처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이번 여행이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경험이었다”고 고아성은 덧붙였다.

스물두 살 여배우 고아성은 보고, 듣고, 쓰고, 겪고, 그리고 연기한다. 배우로서 삶과 자연인으로서의 일상을 구별하고 균형 잡고 똑같이 존중한다고 했지만, 고아성의 연기엔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숙성한 사유와 일상의 숨결이 삼투돼 있다. ‘우아한 거짓말’은 그 증거일 뿐 아니라 한국영화가 왜 이 젊고 영리한 여배우에게 기대를 품어도 좋은지에 대한 명백한 답변일 것이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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