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한공주’, 감정의 파문을 만드는 소녀의 표정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공주야, 네가 잘못하지 않은 거 다 알아.”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지만, 여고생 ‘한공주’(천우희 분)는 다니던 학교를 도망치듯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 공주는 말한다.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도망쳐야 하죠?”

세상은 묵묵부답이지만 삶은 계속돼야 한다. 슬픔과 상처를 꼭꼭 감춘 채 공주는 새 학교에 들어가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귄다. 다치고 닫혔던 마음을 여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손을 먼저 내밀어준 친구들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같은 반이자 아카펠라 동아리의 회원인 ‘은희’(정인선 분)가 살갑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매몰차게 외면했지만, 친구의 진심에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풀어갔다. 기타와 노래가 힘이 됐고, 친구들과 우정의 ‘다리’가 됐다. 그렇게 자신을 버린 어머니도, 술에 취한 분노뿐인 아버지도, 오갈 데 없는 처지도 조금씩 잊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을 향해 힘들게 떼어놓은 발길을 다시 잡은 것은 악몽같은 과거였다. 친구들의 권유로 온라인에 올려놓았던 동영상이 연예기획사의 부름을 받을 정도로 화제가 되자, 이를 보고 한공주의 행방을 알게 된 가해 소년 부모들이 학교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한공주는 끔찍한 소년범죄의 피해자였고, 같은 일을 당했던 소녀의 친구는 자살했으며, 가해 학생들은 유죄판결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망가야 했던 것은 피해자였으며, 쥐죽은 듯 숨어살아야 했던 것도 아무 죄없는 소녀였고, 지옥을 감당해야 했던 것도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 아니라 악행을 당한 이였다.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라는 소녀의 외롭고 가녀린 항변에 세상은, 어른들은,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 ‘한공주’(감독 이수진)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끔찍한 상처를 안은 소녀가 스스로를 치유해가며 다시 세상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안간힘을 그린 작품이다. 분노의 폭발도, 슬픔의 토로도 없이 감독과 배우는 담담한 어조로 극을 이끌어가지만, 모든 장면이 희로애락의 표정을 지으며 관객들의 마음 속에 너울을 만들어낸다. ‘써니’와 ‘마더’ 등에 출연한, 젊은 여배우 천우희의 섬세한 연기는 관객에게 조심스러운 희망의 싹을 심기도 하고, 먹물처럼 번지는 절망과 슬픔의 파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공주’는 한국 독립영화의 성취이자 발견으로 꼽히며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로테르담, 프리부르, 도빌 등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행진을 하고 있다. 한국영화의 흔할 법한 소재를 새로운 시각과 성찰을 담은 매력적인 인물과 이야기로 풀어낸 이수진 감독은 한국 영화계의 새로운 기대주라 할만하다. 시사회 후 극장과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 독립영화 로는 이례적으로 일반 상업영화 버금가는 181개 스크린에서 대규모로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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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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