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났을 땐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미국 생활 길라잡이’의 녹음을 막 마친 직후였다. 미국 이민 생활의 경륜을 말해주듯 그의 온화한 미소와 신사다운 말끔한 옷 매무새, 헤드폰 사이로 희끗거리는 회색 머리가 그의 살아온 커리어를 말해주는 듯하다. 지난해 샌디에고 라디오 코리아에서 수여하는 ‘자랑스런 한인상’을 수상한 그에게 작년 한해는 상복이 터진 해였다고 해야할까? 오바마 대통령이 수여하는 대통령 봉사상 금상을 수상하기도해 그의 봉사가 하나의 결실을 맺는 해였다.
하지만 그의 수상 의미는 사실 상보다는 한인 커뮤니티에 뿌려진 봉사의 씨앗들과 그의 땀이 이제 결실을 맺어 한인 커뮤니티 발전의 초석이 마련된 점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지난해 그는 그 어느 단체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카운티 보조 프로그램을 한인 커뮤니티 최초로 시니어 프로그램에 접합, 유치시키는데 성공했다.카운티 정부를 상대로 펀드를 유치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봉사경험 속에서 터득된 노하우와 봉사에 대한 남다른 집념에서 비롯됐다. 고희를 바라보는 유 회장의 33년 이민자로서의 삶을 들어본다.
-커뮤니티와 타인를 위한 봉사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제가 1971년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지요. 어렵게 학업을 마치고 졸업한 후 바로 3M사에 취직이 됐지만 제게 한달 안에 미국을 떠나지 않으면 추방 당하게 될 것이라는 통보가 날아왔습니다. 연고자도 없는 제가 한달 안에 영주권을 따서 합법적인 신분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죠. 사정을 전해들은 3M사의 동료들이 사방으로 도움의 손길을 찾아주었습니다. 회사 매니저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월터 먼데이 상원의원을 찾아가 제가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도록 임시 법안을 상정하도록 했고 회사 변호사가 저의 영주권 수속을 진행시켜 추방이 지연되고 저는 3년만에 영주권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때 미국 동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꿈을 잃은 추방자의 모습으로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거나 미국에서 불안한 불법 체류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을 겪고 난 후 저는 그 동료들에게 한없는 감사의 마음과 함께 인종을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 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그들을 생각하며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면 제 일처럼 마음을 열고 도움의 손길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1000시간이 넘는 사회 봉사 공헌을 인정받아 오바마 대통령상을 수상했는데 어떤 봉사를 해오신 건가요?
▲영주권과 시민권 취득을 위한 시험공부와 수속, 메디칼과 소셜 시큐리티, 그리고 병원비 등 어려움에 처해있는 분들을 도왔습니다. 이민자로서 겪어야하는 어려움 중에 가장 큰 것이 미국인들과 동등한 시민으로서 행사해야 할 권리를 갖지 못할 때이죠. 그것은 자신의 생존의 문제이면서 부차적인, 예를 들면 소셜 시큐리티나 메디칼, 메디켈등 사회적 복지 혜택으로까지 연결돼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주권은 제외하고도 저를 통해 시민권을 취득하신 분들이 9년간 약 450명 정도됩니다. 자랑이라기보다 그만큼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반증이지요.
- 많은 분들께 도움을 주셨는데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들려주시지요
▲미망인 한분이 소셜시큐리티를 받지 못하게돼 생계가 어려워졌지요. 사방팔방으로 가주 복지법을 묻고 알아보고 해서 CAPI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서 그분이 혜택을 받도록 신청해 드렸지요. 또 병원 응급실에서 병원비 관계로 치료를 제대로 못받고 거부당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분도 계셨어요. 다행히 제게 연락이 닿아 통역도 해드리고 메디칼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줘 해결했지요. 주로 그런 기본적이면서도 급박한 상황에서 도움이 필요했던 분들이 머리 속에 가장 남습니다. 요즈음 메디칼 봉사직, 메디칼 통역봉사가 절실합니다. 한인사회가 소셜워커들이 많이 모자란 형편이지만 이 메디칼 분야의 소셜워커들이 앞으로 봉사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될 것같아요.
|
- 노인회관 건립에 정성을 쏟고 있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노인회는 한인타운의 가장 어른 단체인데 어르신들을 편히 모실 수 있는 공간, 노인들이 자유롭게 이민 생활의 애환을 달래고 보람을 느끼며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됐습니다. 흔히 말하는 ‘노인복지’는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노인회의 사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주류 정치인들과도 지속적인 교류를 갖고 있습니다. 가장 절실히 느끼는 것이 우리 2세들이 타커뮤니티들처럼 시정부나 카운티,주정부에 많이 진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공공의 삶을 개선하고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정부직 진출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샌디에고 시의회 6지구 의원에 도전하는 캐롤 김 후보는 한인커뮤니티에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노인회관 건립은 현재 어느 정도 진전이 되어있습니까?
▲노인회관 건립기금은 약 13만불정도가 모아진 상태이고 카운티와의 계약으로 노인회 예산도 지난 2011년 약 9만불로 늘어난 상태입니다. 또 노인들을 위한 15인승 전용밴도 2대 제공받고 있습니다. 지난 7월1일자로 카운티와 재계약이 이뤄져 노인회 자산 뿐아니라 지속적으로 예산과 펀딩을 늘려가게 될 경우 매칭펀드를 유치시켜 건립기금도 더 배가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한국의 재외동포재단 등 후원단체들에게 약 1백만불정도 그랜트를 신청해 놓고 있습니다.
-한인단체들이 보다 발전적이고 건강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을 고쳐야 할까요?
▲한인들 특유의 ‘줄세우기’ 관행이 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줄세우기’란 결국 ‘끼리끼리’의 단체를 만들기 쉽고 결국 자기들만의 단체를 유지하면서 소위 말하는 장기적인 집권체제(?)를 만들게 마련이지요. 이른바 ‘적폐’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단체의 건강하지 못한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지요. 결국 내사람을 심어야하고 편가르기를 해야하고 그러다보니 건강하지 못한 부정과 부패가 단체를 썩게 만들게 됩니다. 나와 다르면 적으로 생각하는 분리적 사고가 없어져야만 합니다. 단체 운영 문제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시스템의 문제보다는 결국 운영하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들려주시죠.’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기회와 꿈을 발견하고 잡아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회란 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자에게 오지 않습니다. 본인에게 가장 잘 맞는 것,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라고, 그리고 그 꿈을 쫒아 매진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들릴 지 모르지만 이제 일흔 나이를 코앞에 둔 은퇴한 노인인 저도 새로운 진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인더스트리얼 아트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일류 공학도의 꿈을 꾸면서 기계공학도가 되었지요. 그리고 평생을 우주공학 엔지니어의 길을 걸어왔는데 은퇴를 하면서 오히려 꿈이 더 커졌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해보지 못한 소셜워커의 일을 한없이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저의 궁극적인 삶의 방향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지요. 그래서 요즈음은 북치고 장구치는 젊은 사람들 틈에서 풍물학교 교장 선생님도 하고 젊은이들의 언행을 통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꿈도 함께 커지고 있지요.
-한인커뮤니티에 전하고 싶은 말씀은 또 어떤 게 있으신지요?
▲모든 분들에게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이민 생활을 돌아보며 초심을 지키지 못해 후회했던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한인사회는 모두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그 선한 본심으로 돌아가서 서로 감사하고 배려하며 타인을 돌볼 수 있는 그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또 먼저 배려할 줄 아는 그런 한인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희철 / 샌디에고 라디오코리아 기자
◇유석희 회장은… 1943년 9월 16일 전북 전주 태생으로 1971년 도미, Univesity of Missouri, Columbia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3M사와 Westinghouse, General Dynamics사에서 엔지니어로 활동했다. 은퇴 전까지 록히드마틴 스페이스 유나이티드 런칭 얼라이언스에서 우주 항공 엔지니어로 활동했다. 1984년부터 2년간 한인회 이사직을 맡고 1987년 한인회 수석 부회장에 이어 16대 한인회장직을 역임했다. 한인회 고문과 샌디에고 한미 인권연구소 이사장, 한미노인회 이사장을 거쳐 현재 한미노인회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미주 전역의 전직 한인회장들의 조직인 ‘한백회’의 사무총장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