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여성 팬들을 몰고 다니게 된 그가, 자신의 장기인 로맨틱함을 버렸다. 줄기세포 스캔들을 소재로 한 영화 ‘제보자’에서 유연석은 ‘국익’과 ‘진실’ 사이에서 고민하다 마침내 진실을 폭로하는 연구원 ‘심민호’ 역을 맡았다.
촬영에 앞서 그는 자신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안경을 일부러 골라 썼다. 멋부릴 여유 없는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근육질 몸매가 연구원 역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애써 넉넉한 옷으로 몸을 가리기도 했다. 여심 홀리던 유연석은 ‘제보자’ 어디에도 없었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
무슨 자신감일까. 사실 그는 2003년 데뷔해 10여년 간 무명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매 작품마다 자신의 존재를 또렷이 각인시켰다. ‘올드보이’의 어린 ‘우진’, ‘늑대소년’의 악역 ‘지태’, ‘건축학개론’의 강남 선배, ‘응답하라 1994’의 ‘칠봉’이가 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중은 여전히 놀라워한다.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있어 유연석은 두려움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 “난 진실 만을 말했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줄기세포가 없다고 확신하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윤민철 PD(박해일 분)에게
‘응답하라 1994’가 종영한 뒤 유연석의 행보엔 낯설만큼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늘 하던대로 도전이 필요한 역할을 찾았고, 좋은 감독 및 배우들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작품에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선택한 작품이 ‘제보자’였다.
“칠봉이 이미지의 연장선 상으로 가는 건 원하지 않았어요. 저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은 매 작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점수를 주셨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역할로 경력을 쌓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번 영화에선 처음으로 부성애를 표현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유연석에게 아픈 아이를 둔 가장 역할은 분명 도전이었다.
사실 부성애 연기보다 그를 더 고민하게 만든 건 ‘진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점이었다. 극 중 모두가 줄기세포의 존재를 믿는 상황에서 그는 나홀로 반기를 들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사람이 진실을 얘기할 때 어떤 표정과 눈빛, 어투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잔재주 부리지 않고 최대한 담담하게 사실 만을 전달하자”고 결론 내렸다.
직접 연구원들을 만나 그들을 관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 끝이 벗겨지고 갈라진 분들도 많았고, 여자 분들은 머리를 꼰다던가 이런 습관도 있으시더라고요. 저도 뭔가를 생각할 때 어떤 습관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손톱을 튕기는 제스처를 만들어냈어요.”
#.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준비 됐습니다. 이미 각오한 일이기도 하구요.” -줄기세포 실체를 검증하겠다는 윤민철 PD를 향해 여론의 질타가 쏟아지자 기자회견을 자청하면서
유연석은 여섯살 때 학예회 무대에 선 뒤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즐거움을 처음 맛봤다. 뭔가를 준비해서 보여주고, 박수받는 기분은 짜릿했다. 꼭 배우가 되겠다기보단, 막연히 사람들에게 뭐든 보여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2003년 ‘올드보이’를 통해 연기자로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유연석’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건 쉽지 않았다.
“작품을 하다보면 공백도 생기니까 조바심을 느낀 적은 있죠. 하지만 배우라는 직업에 회의감을 가진 적은 없어요. 아역부터 단역, 조역 등 조금씩 계단을 밟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죠. 같이 일하는 형들이 ‘남자배우 어차피 서른부터’라며 많이 다잡아줬어요.”
지금까지 유연석이 흔들림 없이 연기자의 길을 걸어온 데는 타고난 긍정적인 성격도 한 몫을 했다. 과거엔 조금은 밋밋한 듯한 외모를 콤플렉스로 여기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자신의 외모를 장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 번 봤을 때 쉽게 각인되지 않는 외모 덕분에 오히려 다양한 역할들을 어색하지 않게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덕분에 지금과 같은 필모그래피를 쌓아갈 수 있었죠.”
#. “무엇보다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었습니다” -자신에게 피해가 갈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폭로한 이유를 묻자 심민호의 대답.
30대가 된 유연석은 생각이 부쩍 많아졌다.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자신을 향한 기대치가 커지면서 그만큼 어깨도 무거워졌다.
“작품 선택할 때나 연기할 때 점점 신중해지는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나’라는 배우를 알리기 것에 더 노력했다면, 지금은 ‘작품에서 내가 어떻게 조화롭게 녹아들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하죠.”
개봉을 앞둔 ‘제보자’에서 유연석은 박해일, 이경영, 박원상 등 연기파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다. 내로라 하는 선배들 틈에서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없었을까.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제 캐릭터가 부각됐으면 좋겠다는 욕심보다는, 전체의 작품 안에서 ‘제보자’가 해야 하는 역할을 제가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더 컸어요.”
유연석이 생각하는 좋은 배우의 그림은 분명했다. 그는 “혼이 깃든 작품에 사람들이 감탄하고, 그런 작품을 만든 사람을 장인이라고 하지 않나. 배우도 혼을 담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10년 무명 생활이 그에게 혼신의 노력 없이는 무언가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 셈이다.
유연석의 롤모델은 ‘꽃보다~’ 시리즈를 먼저 찍은 선배들인 ‘꽃할배’ 4인방(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이다. “꽃할배 선배들처럼 되는 게 제 다음의 목표가 됐어요. 언제나 열정적이시고 지금도 여전히 도전하고 계시잖아요. 전 제가 항상 꿈을 꾸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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