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앨범의 표면적인 특징은 줄어든 사이키델릭 사운드, 그리고 비중이 높아진 팝적인 요소와 멜로디입니다. 그러나 주제는 역시 전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편안해진 음악적 표현 방법과 높아진 가사의 가독성은 오히려 이 앨범의 주제를 더 서늘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경쾌한 연주로 진행되는 ‘우리 집은 화목한데’는 실패한 인생에 회의감이 들어 자살한 삼촌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후렴구가 장난처럼 들리는 ‘포스트맨은 벨을 두세 번 울린다’는 빚쟁이에 쫓기는 급박한 처지를 묘사합니다. ‘캐모플라주’는 개성이 더 이상 축복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체념을 노래하고, 심지어 ‘스카이워커’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연인의 동반자살을 암시하고 있죠.
세상에서 ‘나’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나’를 대체할 누군가는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 역시 슬프지만 현실이죠. 이 앨범의 화자는 절망적인 현실을 억지로나마 조증으로 극복하려는 존재입니다. 이 앨범은 이 같은 불편한 진실을 차분한 어조로 노래합니다. 매우 섬뜩한 앨범입니다.
▶ 9와 숫자들 정규 2집 ‘보물섬’(11월 25일 발매)’= 9와 숫자들은 한국 가요 황금기의 서정을 절묘하게 녹여낸 록으로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9와숫자들의 지난 2012년 작 미니앨범 ‘유예’는 무겁고도 서정적인 정서를 담은 완성도 높은 음악으로 한국대중음악상 3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죠.
9와 숫자들은 2년 만의 신작인 이번 앨범에 전작보다 명도를 높인 사운드와 다채로워진 색깔의 음악을 담아내는 변화를 꾀했습니다. 복고적이되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 사운드도 매력이지만, 이 앨범의 강력한 힘은 시를 방불케 하는 가사로부터 나옵니다.
그동안 청년의 사랑과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가사로 담아왔던 9와숫자들은 이번 앨범에도 같은 주제를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하고 있습니다. ‘보물섬’의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그댈 향해 있지 않은 곳은 없었고’와 ‘숨바꼭질’의 ‘버리고픈 내 모습도 그대에겐 소중하다’와 같은 연가(戀歌)의 은유는 문득 가슴 한 구석을 움푹 파고들어 저릿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등을 다루는 ‘높은 마음’의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잡 투 두’의 ‘친구야/언젠가 우린 미소 접어두고/서로 다퉈야 할지 몰라’라는 서늘한 내적인 고백은 참신함을 넘어 음악과 결합한 가사의 힘을 보여주는 지점이죠.
그중 백미는 ‘실버라인’입니다. 이 곡의 “난 우는 방법을 모를 때/참는 법을 먼저 배웠어/소중한 건 지켜내는 것보다/잃어버리는 게 더 편해/난 세는 방법을 몰라서/얻은 것만으로 기뻤고/꿈이란 건 이루는 게 아니라/미루는 것인 줄만 알았어” 같은 가사 앞에선 애써 냉정을 유지하려고 마음에 채웠던 빗장마저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노래’의 사전적 의미는 ‘가사에 곡조를 붙여 목소리로 부를 수 있게 만든 음악’입니다. 이 앨범은 ‘노래’에서 가사는 곡조보다 우선함을 새삼 체감하게 만듭니다.
▶ 국카스텐 정규 2집 ‘프레임’(11월 26일 발매)= ‘새롭다’는 표현은 진부하지만 밴드 국카스텐(Guckkasten) 앞에선 경험명제(經驗命題)입니다. 국카스텐은 데뷔 때부터 독창적이라는 수식어 외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음악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은 흔치 않은 밴드입니다.
이번 앨범 역시 ‘괴물’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고도 다채로운 음악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가장 먼저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더해진 속도감과 화려해진 사운드, 그리고 뚜렷해진 멜로디 라인입니다. 기타 연주가 돌출됐던 전작과 달리 베이스와 드럼 등 리듬 파트 연주의 존재감이 확실해진 것도 큰 변화이죠.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돋보이는 앨범의 첫 트랙 ‘변신’은 말 그대로 밴드의 변신을 읽을 수 있는 멋진 곡입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사운드 메이킹의 진보입니다. 격렬한 합주 속에서도 악기들은 저마다 선명한 소리를 들려주며, 곳곳에 이펙터를 활용한 연주는 마치 다양한 악기를 한꺼번에 연주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뱀의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듯한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뱀’과 몽환적인 사운드로 낙하하는 깃털의 이미지가 펼쳐내는 ‘깃털’, 파리의 날갯짓 소리와 사이렌 소리를 연상케 하는 기타 연주가 귀를 자극하는 ‘감염’과 ‘스크래치’도 주목할 만한 곡들입니다. ‘작은 인질’과 ‘로스트’에 담긴 가야금, 장구 등 전통 악기 연주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밴드의 고민과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 최고은 정규 1집 ‘I WAS, I AM, I WILL’(11월 27일 발매)= 대형기획사를 등에 업은 K팝 한류스타들이 아시아 전역을 휘젓고 있을 때, 단신으로 통기타를 매고 유럽 투어를 돌던 인디 뮤지션이 있었습니다. 그의 다음 마디를 예상할 수 없는 개성적인 음악과 독특한 목소리는 단조로우면서도 감성적인 음악이 주류를 이루는 국내 인디 포크계에선 낯선 것이었습니다. 이 낯선 음악은 국내보다 유럽 시장에서 먼저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그 가능성은 한국 뮤지션 최초로 세계 최대 규모의 음악 페스티벌 영국 ‘글래스톤베리(Glastonbury)’의 공식 초청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죠.
최고은은 지난 2010년부터 지금까지 3장의 미니앨범을 내놓으며 자신의 활동 영역을 국내에서 세계로 넓혀 왔습니다. 특히 지난해에 발매된 미니앨범 ‘리얼(Real)’은 독일의 음악 기획사 ‘송스&위스퍼스’의 초청을 받아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지에서 두 달 간 벌인 유럽투어를 고스란히 담은 결과물이어서 주목을 받았죠.
그러나 최고은의 발걸음은 신중했습니다. 그는 정규 앨범 발매에 욕심을 내기보다 3장의 미니앨범을 통해 지금 자신의 음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 집중했죠. 이 같은 신중함은 첫 정규 앨범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높은 완성도의 결과물을 낳았습니다.
음악을 통해 내 안의 악마를 깨우겠다는 다짐을 담은 ‘몬스터(Monster)’는 브리티시 록을 연상케 하는 사운드로 이전과는 또 다른 최고은의 변신을 알립니다. 그동안 주로 영어 가사로 노래를 만들어 온 최고은은 소통의 어려움을 표현한 ‘마이 사이드(MySide)’에선 시적인 감각의 한글 가사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합니다. 특히 강렬한 밴드 사운드와 보컬의 탄력적인 합을 느낄 수 있는 ‘스톰(Storm)’은 이번 앨범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압권인 곡이죠. 원테이크(끊임없이 한 번에 녹음하는 방식) 녹음을 통해 자연스러움을 살린 사운드는 그 자체로 청자를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 한음파 정규 3집 ‘이명’(11월 28일 발매)= 한음파는 단 한 번도 대중에게 귀에 설은 소리를 들려준 일이 없습니다. 한음파는 마치 불편함을 숙명으로 여기듯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 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오며 낯설음을 세련시켜왔죠. 날카로운 록 사운드를 강조했던 전작과는 달리 이번 앨범은 프로그레시브 록과 월드뮤직을 방불케하는 다채로운 색깔의 음악으로 유연함을 더한 것이 특징입니다.
풀고 당김을 반복하는 변화무쌍한 전개와 이를 이끄는 마두금 선율로 변화를 알리는 ‘곡예사’, 보컬과 기타의 현란한 표현력이 압권인 ‘크로(Crow)’,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사회상을 은유하는 ‘유령선’, 기타를 중심으로 한 공간감 있는 사운드와 차갑고도 명징한 멜로디가 인상적인 ‘백야’ 등 앨범에 전진배치된 곡들은 한음파의 새로운 음악적 실험을 알리는 증거들입니다. 정교한 리듬 연주를 들려주는 ‘배니싱(Vanishing)’, 마두금과 보컬의 합이 돋보이는 ‘아우트로(Outro)’는 듣는 즐거움을 주는 곡들이죠.
한음파는 원하는 사운드를 만들어내기 위해 프로듀싱부터 녹음, 앨범 재킷 디자인까지 직접 참여해 앨범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듬었습니다. 또한 한음파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수록곡 절반 이상을 원테이크로 녹음했습니다. 이를 통해 한음파는 악기 개개의 연주가 확실히 구별되면서도 한 덩어리로 들리는 살아있는 사운드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한음파는 록이라는 큰 틀 외엔 한국 대중음악의 그 어느 계보에도 속해있지 않은 밴드입니다. 다음 마디를 예측할 수 없는 구성, 그 위로 쏟아지는 변박과 불협화음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 불편함의 근원은 낯설음입니다. 그러나 낯설음이 대질을 통해 익숙해지면, 이 음악은 살아있는 비정형의 덩어리로 변모하고 동시에 불편함은 매혹으로 치환됩니다. 한음파의 새 앨범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낯설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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