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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내내 울었다. 국제시장 덕수는 바로 내 이야기…”
가든그로브에 사는 원윤희씨(84). 그는 지난 주 부인과 함께 라하브라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온 아내가 당신도 봐야 한다며 며칠을 성화였다. 난데없이 영화라니…. 젊어서도 안 한 짓을 왜 나이 먹어 하냐며 무안을 줘도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국제시장’을 본 후 원윤희씨는 심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두 시간 내내 얼마나 울었던지 그날 저녁에는 병원신세까지 졌다. 두 시간 동안 그가 본 것은 바로 그가 살아 온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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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부터 그냥 머리를 한 대 맞는 거 같았어. 그 추웠던 바닷가의 눈보라…. 여기 저기 울부짖는 사람들…. 며칠만 있다가 돌아오라 했던 어머니…”
원윤희씨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진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단천. 중공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연합군을 몰아내고 있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형들과 함께 며칠 몸을 피했다가 돌아오라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만 집에 남기고 삼형제는 배를 탔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였다.
“우리는 흥남부두가 아닌 원산항에서 배를 탔다. 20일 가량 걸려 속초에 도착해 보니 흥남에서 그난리가 났었다고 하더라. 어머니와 동생들도 혹시 배를 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갔다고 해서 우리도 부산으로 갔다”
마리아 이씨(86. 가든그로브)도 같은 사연을 가진 실향민이다. 원윤희씨와 같은 마을에서 자라 같은 배를 타고 피난길에 오른 인연으로 지금까지 친동기간처럼 지내고 있다.
“그때가 21살 새색시였다. 남편과 둘이 남으로 피하자 했다. 부유한 친정에서 자라 교육도 받고 책도 많이 읽었다. 무조건 남쪽으로 가야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했고 목숨을 걸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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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의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그 대가는 컸다”
이씨는 남편과 함께 초량 피난민 마을에 정착했다. 영화에 나왔던 국제시장과 지척인 거리다.
“국제시장은 당시 피난민들의 눈물과 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다. 군부대를 통해 흘러 나왔던 미제 물건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낳고 살았던 탓에 영화를 보는 내내 옛날 생각에 눈물이 났다. 꽃분이네 가게도 아는 곳이다. 원래는 이름이 영신상회다. 영화 때문에 이름까지 바꿨는데 신문을 보니 너무 유명해져서 문제라고 하더라”
마리아 이씨는 지금도 신문을 빠지지 않고 본다.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할 정도로 활동적이며 정치 경제에도 박식하다. 이씨는 “그래서 내 인생이 더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현모양처만을 미덕으로 삼았던 세상이 그에게는 너무 큰 산이었다.미국 이민을 생각한 것도 이씨가 먼저였다.
“살아도 늘 가슴에는 고향생각 뿐이었다. 내 나이 오십이 되니 이대로 더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오직 고향에 가기 위해 미국이민을 택했다”
1980년. 이씨에 이어 원윤희씨도 미국으로 들어왔다. ‘피난민’ ‘실향민’에 이어 두 사람에게는 ‘이민자’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독일로 떠났던 덕수와 영자처럼, 두 사람도 낯선 땅에서 죽을 듯이 일 했고 땀만큼이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청소부터 막노동까지 안 해 본 것이 없다”라는 이씨에게 “그래도 누나는 영자처럼 시체 닦는 일은 안 했잖소”하며 농담을 던지는 원씨. 허허 웃는 두 사람의 눈이 또 촉촉해 진다.
영화 속 덕수가 잃어버린 동생을 찾았던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한창이었던 1983년. 원윤희씨도 아내와 함께 여의도를 찾았다. 광장을 뒤덮고 있던 종이들과 그곳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며칠을 눈을 비벼가며 가족을 찾았지만 그곳에 어머니의 이름은 없었다. 그때도 원씨는 며칠을 앓아 누워야 했다고.
지난 2000년, 두 사람은 미국 시민의 신분으로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밟았다. 혹시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성껏 선물도 준비했다.
“그 심정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겠나. 같이 간 사람들 중에는 두고 온 자식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모두 목숨을 걸고 갔다. 목숨 걸고 빠져 나온 고향에 다시 목숨을 걸고 들어갔으니 우리같이 불쌍한 사람들이 또 있겠나”
하지만 그곳에는 평생 그리워하던 얼굴은 없었다. 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신 후였다. 세월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우리 나이를 보라. 이제 얼마 남지 않는 생이다. 소원? 눈을 감기 전에 통일이나 봤으면 좋겠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통일을 바라기나 할까?”
힘없이 허허 웃는 원윤희씨를 보고 누나 마리아 이씨가 목소리를 높인다.
“통일이 되야지! 젊은 사람들에게 알려 줘야지. 부모 세대가 못했으면 자식이 해야 할 일 아닌가. 주말엔 우리 아들 손 잡고 가서 국제시장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울고 있다. 아직 위로받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서, 아버지 영정을 부여잡고 ‘그런데 아부지….지 진짜 힘들었습니더”라며 흐느끼던 덕수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 된다.
하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