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알려주마] “한국 드라마는 세렝게티 다큐”…왜 아직도 기승전멜로인가요?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한국드라마는 무슨 세렝게티에서 찍은 다큐를 보는 느낌이다. 먹이사슬 관계가 분명하고 먹는 시간 외엔 열심히 짝짓기만 한다. 오늘도 짝짓기 내일도 짝짓기 (byna**** )”

KBS 예능국에서 제작한 첫 드라마 ‘프로듀사’의 기사에 달린 한 네티즌의 댓글입니다.

“이 드라마는 전문직 드라마도, 뭣도 아니에요. 제2의 ‘겨울연가’예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프로듀사’의 서수민 PD는 드라마 방영 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100% 리얼을 표방한다는 사전 홍보가 무색하게도, “과장과 리얼이 섞였으며, 없는 인물(행정반 고양미)을 창조”했고, “예능 PD들의 세계를 그린다”고 했으나 예측불가능한 러브라인을 앞세운다는 거죠. 어차피 로맨틱코미디에 단련된 박지은 작가(별에서 온 그대)가 아니었던가요.


사실 이유가 있습니다.

‘프로듀사’는 드라마 기획 단계부터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배우(차태현 공효진 김수현 아이유)와 제작진(박지은 작가, 서수민 PD, 표민수 PD)의 조합으로 일단 화제성은 안고 들어갔습니다. 우려가 있다면 전문직군, 불특정다수를 상대하고 있는 방송사 예능국 사람들의 뒷얘기가 일반 시청자에게 어느 정도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죠. 이 같은 우려를 타개하기 위한 비책으로 제작진은 ‘멜로’를 떠올렸습니다. 주부 시청자들을 설레게 할 러브라인의 강화입니다. 드라마 속 연상연하 커플인 공효진과 김수현의 조합이 여성 시청자에게 판타지를 불러오기에 좋은 장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30~40대 이상의 여성 시청자를 붙잡아야 하는 것은 TV의 속성이라고 방송 관계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미디어 환경이 달라지니 이 명제는 더 분명해집니다. 10~20대는 TV 앞을 떠났고, 리모컨을 쥐고 있는 것은 중장년층이죠. 요즘 그 중에서도 2049 시청자는 상당히 중요해졌습니다. 콘텐츠 소비가 가장 적극적인 세대, 그 소비현상으로 바이럴 마케팅을 하는 세대, 그럼으로 인해 따라붙는 광고 상품의 판매까지 높이는 세대죠.

그들을 공략한 방송사의 전략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일관된 드라마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인기스타, 정형화된 캐릭터, 뒤엉킨 러브라인(4각관계), 그 관계는 절절하듯 풋풋한 풍성한 멜로로 그려집니다. 기존 공식에 충실하면 ‘기본타는 나온다’는 인식이 자리잡혔습니다. 안일한 착각일 수 있습니다. 진화한 시청자는 굳이 멜로가 없어도, 드라마를 소화할 준비가 돼있는데 말이죠. 그걸 모르는 건 제작자들입니다. 광고판매와 직결되는 시청률 추산표에만 집착한 나머지 수십년 전 인기드라마들이 만들었던 공식을 답습합니다.

물론 멜로가 전면에 배치됐다고 모조리 구태의연한 건 아닙니다. 의사도 변호사도 정치인도 사람 사는 곳에선 일도 하지만 연애도 합니다. 사내커플도 적지 않긴 합니다만, 시청자들의 눈에 한국드라마의 멜로강박증은 거듭된 자기복제로 보이는 수준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안방 드라마를 조롱하는 인터넷 신조어들이 생겨납니다. ‘기승전멜로’라거나, 전문직 드라마를 표방하며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 ‘법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라거나. 이미 한국드라마의 고질병으로 꼽혀온 멜로 강박증은 급기야 ‘세렝게티 다큐’를 보는 것 같다는 반응으로 이어집니다.

‘프로듀사’에서도 4명의 남녀가 뒤엉킨 러브라인으로 안방을 찾습니다. 제작진은 사전에 천명을 한 셈입니다. 다만 이 드라마는 일과 멜로를 매회 주제에 맞춰 영리하게 엮어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대다수의 한국드라마를 한 데 묶어 조롱하는 이 같은 반응들은 흔해 빠진 ‘로맨틱 코미디’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질타로 보입니다.

취업은 물론이거니와 연애도 결혼도 포기한다는 삼포세대가 넘쳐나는 시대에 또 연애라니요. 뜬구름 잡는 드라마 속 연애사에 공감대 형성은 커녕 대리만족 마저 느끼기 어려운 때가 됐습니다.

지난해 연말을 뜨겁게 달궜던 tvN ‘미생’, 올초 안방을 들썩이게 했던 SBS ‘펀치’는 그 흔한 러브라인 없이도 주제의식을 살리며 사랑받았습니다. 미드, 영드에 길들여진 젊은 시청자들은 예쁘고 멋진 남녀 주연배우들이 등장해 사랑하고 이별하고 지지고 볶는 연애이야기 대신 다층적인 인간사와 우리 현실의 맨 얼굴을 보여주며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를 볼 준비가 돼있습니다. 한 발 앞서 새로움을 찾는 시청자들에겐 과거의 식상한 공식보다 조금 더 과감한 도전이 박수받는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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