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들’의 촬영을 끝내고 꽤 시간이 흘렀지만, 이병헌(45)은 배역의 여운을 여전히 느끼는 듯 보였다. 그가 연기한 ‘안상구’는 극 중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재벌 회장의 뒤를 봐주는 정치깡패로 야망을 키워가던 중, 한 순간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자신을 망가뜨린 재벌, 언론인 등의 비리를 파헤치는 과정은, 결과적으론 불의에 항거하는 싸움이 되면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안상구는 정치깡패이면서도 영화광이고 패션에 집착하는 사람이예요. 20년 세월이 지나도 늘 똑같은 스타일을 고수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다양한 외모 변화를 보여준다는 건 그만큼 패션이나 스타일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라는 거죠. 고전영화의 대사들을 읊조리는 장면도 있는데, 사건 중심으로 스피디하게 편집돼다 보니 잘려나간 부분이 많아요. 아쉽긴 하지만 영화는 전체를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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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 당하고 분노를 삭이는 인물이라고 해서, 안상구가 시종 거칠고 진지한 것 만은 아니다. 때때로 허술한 모습이 허를 찌르는 웃음을 준다. 안상구의 무식한 구석이 드러나는 대사라던지, 통유리로 된 모텔 화장실 때문에 안상구와 우장훈 검사(조승우 분) 사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등이 그렇다. 이병헌은 ‘내부자들’이 묵직한 사회고발 드라마라는 점에서 “쉴 틈을 주는 캐릭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거의 현장에서 애드리브를 하거나 즉흥적으로 상황 설정을 바꾸는 식이었어요. 화장실 씬에서 벽을 통유리로 바꾼 것도 촬영장에서 아이디어를 낸 거였고요, 뜨거운 라면을 먹다가 뱉는 신도 애드리브였죠. 자칫 삼류코미디처럼 보일까봐 걱정했는데, 현장에서 다들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드라마 ‘내일은 사랑’ 이후로 이렇게 애드리브를 많이 한 건 처음이예요.(웃음)”
능구렁이같은 인물들과 이들의 음모가 긴장감을 자아내는 영화지만, 긴박한 액션 장면도 있다. ‘지.아이.조’ 시리즈,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등에서 수 차례 액션 연기를 경험했지만, 이병헌에겐 이번 작품에서 선보인 ‘생활 액션’이 훨씬 더 어려웠다고. 그는 “소위 말하는 ‘개싸움’이 더 힘든 것 같다”며 “영화의 액션은 서로의 약속인데, 아무렇게나 때리고 뒹구는 걸 일일이 다 약속해서 합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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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은 어느덧 연기 25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는 지난 20여 년을 돌이켜보며 ‘공동경비구역 JSA’, ‘번지점프를 하다’, ‘달콤한 인생’ 등을 유독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꼽았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그가 네 편의 영화를 실패한 뒤 거둔 성공이었다는 점, 영화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업계에서 인정받게 한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병헌을 제외한 배우들이 당시 대부분 신인이었기에, 촬영이 없을 때도 현장에 나갈 만큼 그에게 무게가 남달랐던 작품이었다. ‘달콤한 인생’은 해외 영화제에 초청돼, 할리우드와의 가교를 만들어 준 역할을 했다.
이번 ‘내부자들’ 역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각별한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파란만장한 인물을 연기한 점은 물론, 처음 도전하는 사회비판적인 성격의 드라마라는 점에서 그렇다. 사생활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스크린에서의 존재감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도 언젠가는 극의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부에서 만족해야 하는 시기를 맞을 터. 이 점에 대해선 의연했다. 그는 외적인 젊음을 유지하는 것에 큰 강박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배우가 제 나이에 맞게 나이들어 가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좋아하던 배우인데 세월이 흘러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인상이 바뀌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안타깝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죠. 저 혼자만 나이드는 것도 아니고, 세월의 흐름이라는 게 제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거니까. 제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엔 순응을 잘 하는 편이예요. 영화 흥행도 마찬가지죠. 모든 작품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니, 결과는 겸허하게 받아들일 뿐이예요.” [사진 제공=호호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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