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 생활 시작한건 맏딸 책임감
걸그룹서 연기자…이젠 ‘100억 소녀’
아빠 차 사드리고 작년에 집도 이사
숨겨진 진짜모습 찾아준 감독께 감사
“걱정마, 아빠!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아파트 사줄게.”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우린 언제 반지하를 벗어나냐”는 막내 노을(최성원)에게 아빠(성동일)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다독였다. 아빠를 위로한 건 덕선이었다.
혜리(22)도 그랬다. “아빠 차 바꿔드렸어요. 집도 작년에 이사했고요.”
tvN‘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역을 열연해 최고의 주가를 높이고 있는 혜리는 이제‘ 100억의 소녀’로 불린다.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
‘가족’ 때문이었다. 만 열여섯에 걸그룹으로 데뷔했다. 걸스데이에서 가장 인터뷰를 많이 하는 ‘핵심’ 멤버로 성장했다. 스스로 “운이 좋다”고 말한다. “이 운을 다 써버리면 안된다”고, “말년에 운이 없다”고. ‘잠실 얼짱’ 출신의 걸그룹 멤버는 관찰예능(MBC ‘진짜 사나이’)를 통해 ‘애교의 여왕’이 됐다. 주춤하나 싶었는데, 그럴 리 없었다. 이번엔 드라마로 보여줬다. tvN ‘응답하라 1988’이었다. 소속사 관계자는 “가지고있는게 많아 기회를 잘 잡는다”고 말한다.
“누구나 한 번씩은 꿈꾸잖아요. TV에 나오는 사람이 될거야, 연예인이 될거야. 저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그렇다고 오디션을 보러다니는 것도 아니었어요. 마음은 컸지만, 설마 내가 되겠나 싶었죠. 운이 좋았고, 좋은 기회가 왔어요.”
엄두도 나지 않았던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건 맏딸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책임감. 그런 것 때문에 시작했어요.” 돈을 벌어야 했고, 가족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덕선이처럼 말이다.
“안녕하세요!” 목청 높여 먼저 인사하는 목소리에 혜리와 덕선이 고루 섞였다. 케이블TV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응답하라1988’을 마친 후, 포상휴가를 다녀왔다. 밀린 일정들이 남아있지만, 그간의 성원에 보답하려 언론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머리 모양도 덕선이 그대로였다. “인터뷰 때문이기도 하고, 예쁘다고 해주셔서…아하하.” 화장을 조금 더 했고, 18년을 건너뛰어 스물두 살 다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tvN의 히트메이커’ 신원호 감독과 이우정 작가는 혜리에게서 덕선이의 모습을 봤다. “방송이 만들어진 모습인지, 진짜 모습인지 눈 여겨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고된 군생활에 독사같은 소대장의 눈치를 보고, 내내 풀 죽어 있다가 입을 크게 벌린 채 밥을 먹었다. 영민한 걸그룹 멤버처럼 보였다. 자신이 어떻게 보여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 아는 방송꾼. 그러다 툭 튀어나온 한 마디. “근데 우린 언제 웃어요?” 그 한 마디에 혜리의 성격이 모조리 드러났다. ‘진짜 사나이’에서다.
“(신원호)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너 원래 그런 애구나’. 멍청하기도 하고, 어리바리하기도 하고. 활발하고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고. 웃고 싶어요.”
혜리의 진짜 모습들, 스스로 잘 알지 못했던 숨은 모습들이 하나씩 더해져 덕선이가 완성됐다. “전 제가 똑똑한 줄 알았어요. 하하.” 신원호 감독의 주문은 쉬웠다. “혜리야, 그 때 하던 거 있잖아. 너 잘 하는 거. 바보 같은 거.” 귀에 쏙쏙 들어왔다고 한다. 그저 자신을 보여주면 충분했다. “방송 전 우려와 악플이 많았다는 거, 지금 인터뷰하면서 알았어요. 하하.” 작은 얼굴로 입을 크게도 벌린채 또 웃는다.
‘응팔’은 덕선이와 혜리의 ‘성장 스토리’였다. 덕선은 헷갈리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말 많았던 ‘남편찾기’를 끝냈다. “혼란스러웠지만, 택이는 늘 덕선이의 무의식이었다는 작가님의 이야기에 알게 됐어요. 더 신경쓰이는 것, 그게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혜리의 첫사랑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오랜 친구로 지내다 시작된 감정이었다. 열여덟 덕선은 길을 찾아가고, 사랑을 알아가고, 가족의 소중함을 새겨갔다. 혜리는 덕선을 만나며 데뷔 6년차 걸그룹 멤버에서 연기자로 보폭을 넓혔다. “‘응팔’ 전엔 (연기) 진짜 못했죠.” 든든한 지원군이 돼준 제작진과 스파르타식 대본 리딩을 거쳤다. 감정을 쏟아내는 법도 배웠다. 걸그룹 멤버들의 두 번째 행보인 연기도전은 네 작품만에 성공을 거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생겼다.
“자신감은 있는데, 나에 대해 늘 반문했어요. 내가 이걸 잘 할 수 있을까. 이건 안 될 것 같은데. 항상 선을 그었어요. 사실 무서워하는게 많아요. 겁도 많고요. 정신적인 한계를 넘는 것이 힘들었는데, 그걸 이긴게 대견한 것 같아요. 하나의 벽을 깬 거니까요.”
쉼 없이 달렸다. 365일 중 300일을 일했고, 이젠 ‘100억 소녀’로 불린다. “전 쓰는 돈이 없어요. 쇼핑도 안 좋아하고, 차도 없어요. 저한테 쓰는 돈은 아깝더라고요. 가족한텐 아니에요. 이렇게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가족이거든요.”
드라마를 마쳤지만, 밀린 스케줄이 많다. 그래도 돌아오는 설에는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4박 5일 일정. “어딘지는 말 안 할래요. 아하하.” 온전히 가족하고만 보내는 시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혜리의 얼굴에 덕선이가 찾아왔다. 이번엔 장난기 가득한 열여덟 소녀의 얼굴이었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