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결국 갈등의 중심에 서는 연기 저력

[헤럴드경제=서병기 선임기자]배우 정진영은 어떤 작품에서도 묵직한 역할을 수행한다. 무게감과 존재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브레인’에서 정진영은 인술을 펼치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광기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다가 뇌종양 수술후 세상을 통달하고 관조한듯한 김상철 교수를 연기했다. 신하균과 붙는 장면은 몰입도를 크게 높여주었다.

얼마전 끝난 MBC 월화극 ‘화려한 유혹’에서는 딸 강일주(차예련)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을 지닌 전 국무총리 강석현 역으로 극을 이끌었다. 광기와 슬픔을 오가는 그의 연기는 ‘화려한 유혹’의 깊이와 섬세함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연기할 때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강력한 극성을 만들어내며 시청자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화려한 유혹’에서는 30살 넘는 나이 차이가 나는 신은수(최강희)와 멜로 연기도 펼쳤다. 강석현을 죽이기가 쉽지 않았는지, 원래 죽기로 한 시점보다 몇 회나 지나 종영하기 직전 죽었다.


“30살 넘은 나이 차이에서 시청자들이 거부감을 느끼시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사랑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어느 정도 설득되신 것 같다(웃음). 사랑이란 게 참 묘하다. 피 눈물 없이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부패한 정치가가 자기 딸을 정치인으로 만들었지만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한 여인을 만나면서 과거를 돌이켜보고 반성한다. 시한부 판정이 아니었다면 은수가 나를 안받아들였을 것이다. 나에겐 은수가 유일한 동아줄이었고 반성을 하게 한 구원자였다. 사랑은 이성적으로 판단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최강희의 맑은 눈을 바라보며 연기하니 멜로연기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떡복이를 먹으러 가는 등 달달멜로는 좀 어렵더라.”

정진영은 멜로 세포가 다 죽은 줄 알았던 60대가 사랑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은수에게서 자신이 과거에 좋아했던 청미라는 여자를 먼저 떠올렸다. 그러면 청미를 가장한 은수가 들어왔다. 그 다음은 청미가 아닌 은수로 보였다.

정진영은 멜로를 예상했지만, ‘춘향전’의 로맨틱한 변학도 버전 정도일 줄 알았다. 이 정도로 감정과 농도를 짙게 가져갈지 몰랐다. ‘맥배드‘와 ‘리어왕’을 동시에 한 셈이다.

“내가 멜로를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개연성 있는 스토리라면 어떤 것도 녹여낼 수 있다. 멜로로 다가간 것은 의외의 소득이라 생각한다. 멜로가 생각보다 진하게 그려져 나 자신도 놀랐다.”

정진영은 ‘화려한 유혹‘의 원래 제목인 ‘움직이는 성채‘ 대본을 4부까지 읽었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명했다. 통속적 소재지만 다르게 접근하고 표현할 것이고, 그런 인물이 강석현이라는 감독의 말에 출연을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악연으로 출발했지만 그 아픔을 진정성 있게 끌고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멜로도 예상보다 진해져 정진영과 최강희간의 멜로의 화학작용이 이뤄졌고, 강석현이라는 인물의 깊이가 더 생겼다.

“내(강석현) 감성을 지배하는 것은 니힐(허무)이었다. 청미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는 강석현은 한마리야수였다. 강석현은 웃지 않는 사람이다. 허무함이 있었기에 은수가 보였다. 은수에 대한 사랑은 욕정 이상, 성적인 관심 이상이었다. 마지막 인생을 맞이한 사람이 내 인생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비춰보는 거울 같은 것이었다.”

정진영은 복수극의 선악구도가 아니어서 좋았다고 했다. 모든 인간은 선하지만, 악한 면도 있다. 좋은 사람이 악인을 이기는 전개방식이 편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그게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극좌파였다가 극우도 아닌 괴물로 존재하는 권수명(김창완)조차도. 상처입은 사람들이 만나, 서로 자신이 더 억울하다고 하는 드라마다. 그게 이번 드라마의 독특한 지형이었다.”(정진영은 김창완 씨가 아티스트여서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뭔가 있어 우리들이 아는 익숙한 연기를 하지 않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정진영은 인물에 대한 연구가 철저하다. 석현이라는 인물이 잘 이해됐다고 했다.

“캐릭터를 표현하려면 그 장벽을 깨야 한다. 그 균열을 발견하고 깨부수는 작업이다. 강석현에게서 허무함이 보였다.

강석현은 비자금을 조성한 정치인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하지만 기본적으로 부끄러움을 지니고 있어 석현으로 다가갈 수 있는 균형이 생겼다. 나는 양면을 지니고 복합적인 심정을 가진 미묘한 인물을 좋아한다.”

정진영은 이번 연기로 ‘할배파탈‘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정진영갤’이 있는 디시인사이드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아들 때문에 덕후 세계를 알게됐다. 덕후를 히키 꼬모리 같은 사회부적응자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이 있었다. 우리는 뭔가 소용되는 일(돈되는 일, 명예 높이는 일)에 투자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을 이해했다.

과거 팬들이 나에게 뭘 사 가져오는 게 불편했다. 사줘도 내가 사줘야 하는 건데. 학생은 공부를 해야지 왜 나에게 시간을 소비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열정이 삶을 살아가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이번에 알았다. 내가 익숙했던 세계, 내가 편한 세계를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도 편견이다. 그렇다면 나는 꼰대가 된다. 알파고가 인간을 이기는 세상이다.“

정진영은 한 중국 평론가가 대만 작가에게 인생관은 있었지만 세계관은 없다고 한 말이 강석현에게 적용된다고 했다.

“강석현 집안 사람들은 거의 다 정상이 아니다. 강석현을 인간적으로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에게 연민을 느낀 적도 없다.

그는 인생관은 있었지만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비자금을 조성해, 그 돈으로 자식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게 비극의 출발이었다. 강석현은 마지막에 부끄러움을 알고 반성한다. 이게 이 드라마의 메시지였다.

자신의 잘못을 그냥 넘기는 것은 대범함이 아니라 체념 같은 거다. 강석현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판단하고 일을 하지만 이게 극적인 매력이다. 만약 강석현이 현명한 종교인처럼 판단했다면 이 드라마는 전진할 수 없었을 거다.”

드라마 캐릭터에 대한 정진영의 얘기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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