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진의 예고편] 소통부재 가족의 2박3일, ‘철원기행’

[헤럴드경제=이세진 기자] “이혼하기로 했다.”

아버지(문창길)의 예고 없던 이혼 선언에 온 가족이 얼음이 된다. 고등학교 교사이던 아버지의 정년 퇴임식 날 식사자리에서다.

다른 학교의 교감선생님인 어머니(이영란)는 썰렁했던 퇴임식을 회상하면서 “도대체 학교생활을 어떻게 했길래 이러냐”고 독설을 날린다. 며느리는 냉랭한 분위기에서 눈치 보느라 여념이 없다. 아들 둘은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고, 아버지는 말없이 고량주만 연거푸 들이켠다. 그러다 ‘이혼하고 싶다’도 ‘이혼하자’도 아닌, “이혼하기로 했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내뱉는다. 철원에 내리는 눈은 계속 거세진다.

영화 ‘철원기행’(감독 김대환)은 소통 부재 가족이 폭설에 갇혀 한집에서 지내게 되는 2박3일 동안의 시간을 담았다. 따로 살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첫째 아들 내외와 둘째 아들이 좁은 관사에서 부대낀다. 아버지의 뜬금없는 이혼 선언 이후 이들 사이에서는 무슨 말들이 오갈까. 이들 대화는 아버지가 이혼을 마음먹은 이유라는 알맹이를 찾지 못하고 주변부만을 맴돈다. 

[사진= 영화 ‘철원기행’ 스틸컷]
[사진= 영화 ‘철원기행’ 스틸컷]

[사진= 영화 ‘철원기행’ 스틸컷]

아버지는 빨래를 개고, 눈을 치우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을 해나간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는 아버지에 가족들은 속이 터진다. 참다못한 어머니는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보라”고 외치며 눈덩이를 던진다. 그래도 돌아오는 건 “추우니까 들어가라”는 말 뿐이다. 며느리 혜정(이상희)도 이혼 선언의 이유가 궁금하지만 직접 묻지 않는다. 남편(김민혁)에게 “아버지한테 말 좀 해 봤어?”라고 미루고, 마냥 천진난만한 막내 재현(허재원)도 마찬가지다. “형이 아버지한테 좀 물어봐봐.”

사실 가족들은 아버지의 이혼 선언보다 다른 문제들에 관심이 많다. 며느리는 새로 가게를 차리려는데 어머니가 돈을 좀 보태 줬으면 하고, 막내아들은 결혼을 앞두고 있어 집을 장만해야 하는 상황이다. 시어머니의 구박에 눈칫밥을 먹지만 한없이 다정하게 행동하던 며느리지만, 사실 그의 ‘속셈’이 한 꺼풀 벗겨져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새로운 즐거움을 준다.

시종일관 무겁고 답답한 분위기지만, 영화는 의외의 순간에서 유머를 사용해 숨통을 틔운다.

마음이 답답한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그거 있냐”며 운을 띄운다. 영화는 곧 흰 눈밭에서 고부간에 맞담배를 피우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이혼 통보받은 날인데 고부간에 맞담배 좀 핀다고 무슨 상관이냐”는 어머니와,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담배를 피워 무는 며느리, 발걸음을 재촉하는 어머니 때문에 담배를 한 모금이라도 더 피우려고 서두르는 모습들은 실소를 자아낸다. 화기애애하게 장을 보다 며느리가 생리대를 집어들자 “이건 따로 계산해주세요”라며 면박을 주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영화는 제19회 부산영화제에서 ‘뉴 커런츠상’을 수상했다.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의 뉴 커런츠상은 아시아의 재능있는 신인 감독들을 선정해 격려한다는 의미가 크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온 가족이 힘겹게 걸어가는 철원 풍경이 기억에 남는 영화다. 21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99분.

jin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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