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진의 예고편] ‘태양 아래’, 연출된 평양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역설’

[헤럴드경제=이세진 기자] 평양에 사는 여덟 살 소녀 진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연습 때문이다. 팔과 다리는 끊어질듯 고통스럽지만, 표정은 언제나 밝고 명랑하게. ‘이 땅에 태어나는 영광을 얻었다’는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도록 말이다.

진미는 북한에서 가장 인정받는 청소년 단체인 ‘조선소년단’에 입단한 소녀 무용수다.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 공연을 준비 중이다. 진미의 조선소년단 입단은 학교에서도 부모님의 직장에서도, 사람이 모이는 어느 곳에서나 축하를 받는 경사다. 정작 진미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태양 아래’(감독 비탈리 만스키)는 진미의 일상을 통해 북한의 민낯을 폭로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구 소비에트 연방 국가였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감독이 러시아와 북한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다. 만스키 감독이 북한 당국의 지원을 끌어내는 것은 수월했다. 북한의 동맹국인 러시아에서 입지가 높은 감독이자 푸틴 대통령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바라던 ‘찬양 일색’의 다큐멘터리가 탄생하지는 않았다.

영화는 애초에 진미의 태양절 공연 준비 과정을 그대로 담겠다는 의도로 기획됐다. 하지만 제작진이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 북한 당국은 진미의 주변 환경을 모두 조작해 버렸다. 만스키 감독과 제작진은 철저히 연출된 것만 보여주려는 북한의 통제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진미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께서 왜놈과 지주놈들을 물리친 이야기”다. ‘왜놈’, ‘지주놈’ 하는 호전적인 말들이 가득한 서너 줄의 문장을 반복해서 강독하는 아이들의 눈빛은 반짝거린다. 


묘한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카메라를 의식하는 북한 사람들의 태도다. 사방이 감시와 통제인 곳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겐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일이 체화된 듯 보인다. 여덟 살 아이들이 지루한 강의 중에 맘 편히 하품 한 번 하지 못하고 주위를 살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애당초 ‘극장국가’ 북한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조작을 전제로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는다’는 다큐멘터리의 기본은 북한이라는 체제에서 구현되기 불가능하다. 하지만 만스키 감독은 이를 다시 뒤틀었다. 북한이 상황을 연출하는 모습을 그대로 찍어 몰래 반출해 영화에 평행하게 붙인 방식이다.

진미 가족의 평범한 식사 장면을 비추던 영화는 갑자기 검은 외투와 선글라스 차림의 경호원 두 명이 얼쩡거리며 촬영을 감시하는 모습을 등장시킨다. 이들의 감시와 디렉션 아래 식사 장면에선 “김치는 비타민이 많아서 암을 예방하고 노화를 방지하는 데도 좋다”는 김치 홍보성(?) 대사가 맥락 없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진미 아버지의 직업도 조작됐다. 진미 아버지는 원래 저널리스트였지만 영화 촬영 직전 북한 당국은 그를 봉제 공장의 엔지니어로 취직시켰다. 제작진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영화 배역을 바꾸듯 아버지의 직업을 바꾼 것을 매우 논리적인 일로 여겼다고 한다. 

아버지가 봉제 공장에서 원단을 이리저리 살피며 북한의 공장을 ‘선전’하고, 진미가 소년단에 입단한 것을 동료들이 손뼉 치며 축하해 주는 장면은 이렇게 완성됐다.


북한은 자신들의 의도와 달리 체제를 고발하는 영화가 완성되자 러시아에 ‘태양 아래’ 상영금지를 요구했다.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였다. 한국에서는 지난달 27일 전세계 최초 개봉했다. 제40회 홍콩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경쟁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했고 제19회 에스토니아탈린 블랙나이츠 국제영화제에서 베스트 감독상과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지난달 26일 한국 기자간담회에서 “남한 사람들이 이 영화에 관심을 갖는 것이 북한에 있는 진미와 진미 가족 보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진미가 건강하고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지내길 바란다”고 했다.

전체관람가. 92분.

jin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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