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굿바이 싱글’(감독 김태곤) 개봉을 앞둔 김혜수를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옅은 화장기에 군모를 눌러쓰고 맨투맨 티를 입은 그는 시상식 무대에서의 화려함도, ‘센 언니’ 카리스마도 없었다. 배우 김혜수가 아니라 인간 김혜수를 마주한 듯했다. 그는 큰 눈으로 곰곰이 생각한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처음에 여배우 이야기라고 해서 하나도 새롭지 않고 호감이 안 갔거든요. 이미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만큼 봤으니까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직업이 그냥 여배우인 거예요. 어떤 철 안 든 여자가 뒤늦게 철들고 진짜 내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죠.”
![]() |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제공] |
‘굿바이 싱글’은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 스타이지만 온갖 스캔들을 달고 다니는 여배우 ‘고주연’의 이야기다. 주연은 어린 시절부터 연예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소속사 대표나 스타일리스트의 보호에 둘러쌓여 “철없이 나이만 먹은” 사람이다. 대중들 앞에 오랜시간 최정점에서 서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은 김혜수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 |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제공] |
그는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캐릭터와 저를 겹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김혜수 다큐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촬영을 시작하면서 주연이라는 캐릭터에 저를 많이 투영할까, 아니면 김혜수를 잊어버리고 연기하는 게 나을까 고민이 많았어요. 결국 후자를 택했죠.”
영화가 묘사한 여배우에 대해서는 십분 공감했다고. 그런데 “배우의 쓸쓸한 고독” 이야기는 이제는 식상하기에 친근한 캐릭터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고 했다. 그는 ”멋지고 아름다운 배우가 그냥 쓸쓸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별로 나랑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내 옆집 사람 같은 캐릭터를 만드는 게 관건이었다”고 말했다.
‘배우가 직업’인 사람으로서 극중 주연처럼 그에게도 억울한 일이 많았을 법 하다. 그는 오히려 ‘쿨’했다. “배우만 억울하겠어요.” 보여지는 직업이라 실제 자신과 간극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억울한 상황이 있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 |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제공] |
“배우는 내가 하는 것 이상의 혜택을 누릴 때도 있고, 많은 익명의 배려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거센 공격도 받죠. 그래서 실체 없이 더 기쁘기도 하고 실체 없이 더 힘들기도 하죠. 극명한 명암이 있을 수밖에 없는 직업인 것 같아요.”
최근 한국 영화계에 돋보이는 여성 캐릭터가 실종됐다는 곡소리가 이어졌지만, 김혜수에게만은 그러한 법칙이 빗겨가는 듯 했다. ‘얼굴 없는 미녀’, ‘타짜’, ‘도둑들’, ‘관상’, ‘차이나타운’ 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풍성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그도 여배우로서 제대로 된 캐릭터 찾기가 어렵다는 문제의식에는 동감한다고 말했다.
“여배우를 위한 역할을 일부러 만들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새롭게 만나는 여성의 군상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한 캐릭터를 관객들도 보고 싶어하고 연기자들도 찾게 되지만 절대적인 수량 확보가 안 되는 거죠. 곧 나오는 ‘소중한 여인’도 시나리오 받은 지 3년이나 된 거예요. 왜 3년이 걸렸겠어요. 그만큼 투자가 어렵다는 거거든요. 현실적으로 여성을 앞세운 영화가 위태롭다는 것, 만드는 사람들부터 용기 내기 힘든 상황인 거죠.”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톱배우’로만 살아온 소감은 어떤지 궁금했다. “사랑만 받았겠어요, 구박도 많이 받았죠. 하지만 제가 받은 그 많은 ‘종합선물세트’ 중에서 가장 컸던 건 사랑이 맞아요. 내 자격으로 누릴 수 없었던 축복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 배우 같다.” 극중 선배로 나오는 배우 손숙이 주연에게 던진 말이다. 김혜수는 손사래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배우가 뭔지도 모르겠어요. 배우라는 지점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또 영화에 특별출연한 손숙과 정원중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평생을 누군가와 공개적으로 함께 성장하고 늙어가면서, 인생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면서 살아오신 분들이에요. 겪어내시고 존재해주시고 잘 버텨주신 분들이잖아요. 가슴이 찡해요. 뒤에서 그림자만 봐도 고개를 숙이고 싶어요.” 이 말에는 30년간 대중과 ‘함께 살아오고 있는’ 김혜수 자신이 닮고 싶은 모습, 그 바람이 어렴풋히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