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①] 시대의 탁한 공기와 묵직한 시선 (리뷰)

[헤럴드경제=이세진 기자] “색깔로 따지자면 붉은색도 검은색도 노란색도 아닌 ‘회색’ 같은 영화”(배우 송강호)

‘회색분자’나 ‘박쥐’는 통상 “나쁜놈”들의 대명사다. 그런데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의 주인공은 그렇지만도 않다. 조선인으로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한 이력이 있지만 현재는 일본 순사가 된, 그러다 다시 조국을 돕는 밀정이 된 사람. 누가 봐도 ‘변절자’이고 ‘기회주의자’인데 영화 ‘밀정’의 시선은 다르다. 영화는 탁한 시대에 살면서 올곧은 노선보다 삐뚤삐뚤한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인물을 중심으로 ‘그때’를 조명하고 있다. 

[사진= ‘밀정’ 스틸컷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이정출(송강호)의 복잡한 속내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선인임에도 뛰어난 언변과 정보력으로 총독부 경무국 경부까지 오른 그는 옛 동지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장옥(박희순)을 쫓는다. 그동안 많이 봤던 인정사정 없는 일본 순사의 모습은 아니다. 추격전 중에도 일본 순사들에게 “쏘지 마라”고 끊임없이 소리치고 마침내 김장옥을 마주하고는 “일단 살고 봐야지”라며 회유한다.

“사망”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김장옥의 서류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그의 뒤로 경무국 히가시 국장이 나타난다. 이정출은 다시 일본인 순사가 된다. 항일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을 색출하고자 2인자인 김우진(공유)을 포섭하는 새 작전을 개시한다. 

[사진= ‘밀정’ 스틸컷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목표가 뚜렷했던 접근이지만, 경성과 상해를 오가며 점차 허물없이 가까워진다. 설상가상 히가시 국장은 ‘이이제이’로 조선인 출신 순사 하시모토(엄태구)와 경쟁을 붙이면서 궁지에 몰린다. 바로 이때 김우진은 “의열단의 밀정(스파이)이 돼라”는 패를 던진다.

갈등하는 이정출이 김우진에게 던진 “다시 만났을 땐 내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장담 못해”라는 대사는 ‘밀정’의 시선을 관통한다. 이정출은 지난해 흥행한 ‘암살’의 염석진(이정재)처럼 신념을 동전 돌리듯 바꿔버린 사람도 아니고, 처음부터 밀정이 될 생각으로 총독부에 잠입한 사람도 아니다. 그저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최선이 아니면 차선의 선택을 하는 인물일 뿐이다. 

[사진= ‘밀정’ 스틸컷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그럼에도 그가 기회주의자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백 퍼센트 송강호의 덕이다. 영화 초반, 밀정이 되기 전부터 흔들리는 복잡한 속내를 드문드문 내비치고, 난처한 상황들이 연이어 닥칠 때의 미묘한 표정과 눈빛으로 내면에서 커지고 있는 소용돌이를 적절히 담아낸다.

‘장화, 홍련’(2003), ‘달콤한 인생’(2005)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등으로 한국 영화계 대표 ‘스타일리스트’로 불리는 김지운 감독의 작품. 일제강점기 경성과 상해를 배경으로 그의 장기인 스타일리시한 미장셴이 펼쳐진다. 클래식, 서부영화 음악, 재즈를 아우르는 영화 음악도 다채롭다.

영화는 한 사람이 스파이가 되는 내용의 첩보영화처럼 시작해 독립운동을 하는 인물의 이야기로 전환한다. 김지운 감독은 “차가운 누아르 영화를 찍으려 했지만 촬영하면서 점점 자의식을 버리고 뜨거워졌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서늘하고 스타일리시한 정서를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아쉬울 수도, 새로운 발견이 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밀정’은 할리우드 영화 직배사인 워너브라더스가 직접 제작투자한 한국 영화 첫 작품이다. 제73회 베니스국제영화제와 제41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됐다. 9월7일 개봉. 15세 관람가. 140분.

jin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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