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김지운 감독과의 만남부터였다. 2005년 김지운 감독과 이병헌이 처음 영화에서 함께 한 ‘달콤한 인생’은 제58회 칸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면서 전 세계에 얼굴을 알린 것. 이후 ‘악마를 보았다’(2010)에서 김지운 감독과 재회한 그는 어떤 영화에서보다도 강렬한 연기를 펼쳤고, 이후 그의 할리우드 캐스팅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는 캐스팅 이유가 따라다니게 됐다.
그의 할리우드 첫 작품은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2009)였다. 미국 영화 출연 소식이 전해지던 당시는 역시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출연하면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때. 게다가 채닝 테이텀, 데니스 퀘이드, 조셉 고든 레빗, 시에나 밀러 등 할리우드 최고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에 이름을 함께 올려 그의 ‘할리우드 꿈’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본 ‘지.아이.조’에서 그의 분량은 미미한 수준. 그마저도 복면을 쓰고 나와서 “굳이 왜 이병헌이 나왔어야 했나”하는 탄식도 이어졌다. 그의 캐스팅 이유 또한 “일본에서 인기가 많아서”였다고 알려지면서 실망감을 드러내는 국내 팬들도 적잖았다.
이어진 작품도 같은 시리즈인 ‘지.아이.조 2’였다. 1편에 이어 ‘스톰 쉐도우’로 출연한 그는 뛰어난 액션연기에 더해 감정씬까지 선보이면서, 단순히 동양에서 온 배우 중 한 명이 아닌 연기하는 배우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지.아이.조 3’의 제작 소식과 함께 이병헌의 캐스팅 소식도 전해졌다. 그의 진출작이자 시리즈로 제작되면서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 주고 있는 시리즈다.
이쯤부터 박차를 가한 그는 ‘레드: 더 레전드’(2013)에서 브루스 윌리스와 액션 호흡을 맞췄다. 단역 수준이던 그가 주연급에 올라선 것도 이때다. 캐스팅 물망에 올랐던 중국 배우들을 제치고 코믹 액션극에서 킬러 역할을 톡톡이 따냈다. 이 영화에서 그는 한국어로 욕도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사진을 스크린에 출연시키기도 했다.
‘터미네이터’가 어릴 적 별명이었다는 그, 2015년에는 ‘터미네이터 제네시스’의 배우로 필모그래피에 ‘터미네이터’라는 이름을 박았다. ‘레드: 더 레전드’에서 존재감을 발휘했던 것에 비해 분량이 적어 아쉬움을 나타내는 관객이 많았지만 ‘일보 후퇴’라는 평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1억5500만 달러 제작비의 스케일 큰 대작에 출연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새로운 타이틀이 됐다.
올해 3월 개봉한 영화 ‘미스컨덕트’에서 그는 비밀스럽게 작전을 수행하는 ‘히트맨’으로 분했다. 알 파치노, 안소니 홉킨스 등 명배우들이 맞붙은 영화였지만 작품 자체는 호평을 얻지 못했다. 기대는 컸지만 국내에선 혹평을 면치 못해 흥행에도 참패했다. 하지만 이병헌 측 관계자는 “애초 저예산 영화로 기획된 작품이었고, 이병헌은 알 파치노와 안소니 홉킨스와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이유 만으로 안 할 이유가 없었던 기회였다”고 말했다.
여섯 번째 작품인 ‘매그니피센트 7’에서 이병헌은 드디어 무술에 뛰어난 동양인, 감초 악역이 아닌 정의로운 역할 ‘빌리 락스’로 돌아왔다. 영화에서 그는 에단 호크 역의 ‘굿나잇 로비쇼’와 절친한 사이로 훈훈한 호흡을 선보였다. 12일 진행된 언론시사회에서 그는 “현장에서 에단 호크와 제가 아이디어가 생기면 즉석에서 대사나 상황을 만들기도 하면서 촬영이 즐겁게 진행됐다”라며 “그동안 숫기도 없고 어떤 제안을 하기도 부끄럽고 용기도 안 나서 그저 대본에 철저한 연기를 했다면 ‘매그니피센트 7’로 할리우드에서도 배우에게 많은 것들이 열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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