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 개최되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장률 감독의 ‘춘몽’이 개막작으로 상영된다. ‘춘몽’은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 필름을 사용한 점도 그렇지만, 주인공 네 명 가운데 세 명을 ‘감독’들이 연기했다는 점이 특별하다.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 ‘무산일기’의 박정범 감독,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윤종빈 감독이 여주인공인 한예리 주위를 맴돈다. 서로 한예리의 관심을 독차지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장률 감독은 양익준ㆍ박정범ㆍ윤종빈 세 감독이 연출했던 영화들의 캐릭터를 그대로 ‘춘몽’으로 옮겨왔다. 그들의 전작을 본 관객들이라면 ‘춘몽’으로 무대만 옮겼을 뿐 계속해서 그 영화 속 캐릭터들이 살아가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장률 감독은 지난 6일 진행된 영화제 기자회견에 참석해 “평소 알고 지낸 영화인들에게 ‘공짜’는 아니더라도 좀 도와달라 부탁했다”라면서 “영화에 모두 실명으로 등장하는데 촬영 현장과 캐릭터와 연기하는 배우가 서로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 관계자들은 감독이 연기로 발을 넓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지욱 평론가는 “기본적으로 연기에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감독으로서 연기자의 역할에 대한 ‘역지사지’가 가능하다 보니 감독을 연기자로 쓰는 감독들도 서로 도움이 되리란 판단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2일 개봉한 이무영 감독의 ‘한강블루스’에도 ‘19금’ 영화들로 유명한 봉만대 감독이 출연한다. 봉 감독은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 이후 ‘아티스트 봉만대’(2013)에서 주인공으로 연기한 경험이 있지만 자신의 영화가 아닌 다른 감독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강블루스’에서 봉 감독은 한강변에 노숙하는 무리의 리더 장효 역을 맡아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진지한 정극 연기를 펼쳤다. 장효는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을 우연한 사고로 잃고 자신을 책망하며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인물이다. 봉 감독은 캐스팅 제의가 들어온 직후에는 정극 연기에 부담을 느껴 고사했지만 이무영 감독의 설득 끝에 출연이 성사됐다. 봉 감독은 “연출자로서 연출자의 생각이 보이다 보니까 더 힘들기도 했다”라며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라고 소감을 전했다.
양익준 감독이나 봉만대 감독처럼 자신의 ‘캐릭터’가 확고한 감독들이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형성한 이미지만큼의 효과를 가진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작품을 보는 눈이 예리한 감독들이 ‘아, 이 감독에게 이 캐릭터를 맡기면 잘 소화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면서 “자신이 연출한 작품의 분위기를 가장 잘 이해하고 인물에 완벽하게 동화될 수 있는 사람은 감독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