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독립운동가는 혁명가로서 비장함과 진중함이 있다. 그런데 박열은 여유와 익살이 있다.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한 여인을 통해 사려와 포용으로 나타난다. 개개인에 대한 존중과 따뜻함도 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보통 중국이나 만주쪽으로 가는데 박열은 제국주의 심장부인 도쿄에 가서 아찔한 항일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다.”
이제훈은 박열이라는 이름을 몰라서 부끄럽다고 했다. 그는 “유관순 누나와 같은 나이대이다. 삼일운동할 때 고등학생으로 태극기를 휘날린 뜨거운 감정의 소유자다. 우리가 몰랐던 박열 같은 분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박열은 일본이 간토대지진후 성난 민심을 달려려고 조선인을 학살했던 사건을 무마시킬 희생양으로 지목돼 검거된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법정에서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해 일본 제국을 발칵 뒤집어놨다.
“법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행위와 신념을 쏟아낼 때 가슴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잘 하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어려운 대사를 담아내는 신이 부담되기도 했지만, 불과 몇 테이크만에 끝냈다.”
박열은 일본에서 일본 사상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본 정부 사상 체계를 거부한다. 그는 화합에 애를 쓴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도 있겠지만 탈민족주의를 원했다. 세계는 하나이며 국가 체제는 아나키즘을 원한 무정부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박열의 20대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후미코는 일본인이지만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를 반대하며 항일운동을 했다. 박열을 소개받자 마자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소개하며 동거를 제안했다.
“후미코를 통해 박열이 더욱 성장한다. 남녀사랑과는 다른, 신념의 동지이자 연인이다. 플라토닉 러브 같은.”
당시 신문에도 두 사람이 함께 찍었던 사진이 나왔다. 그런데 자세가 이상하다. 박열의 왼손이 후미코의 가슴 위에 있어 큰 화제가 됐다.
“저도 신문의 사진자료를 보고 이게 뭐지? 라고 생각했다. 의문과 궁금증이 일었다. 당시 감옥안은 억압이 심했을 것이다. 일본언론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왜곡보도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괴사진이 논란거리가 됐으면 하는 고도의 언론플레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를 탐구하게 했을 거다. 박열은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신 분이다.”
이제훈은 “박열의 독립운동 의미와 가치에 집중하자는 생각에 이준익 감독이 저예산영화로 제작했다”면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고민을 했다. 박열이라는 인물이 왜곡, 미화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칫 독립운동가에 대한 표현이 넘칠 우려가 있는데, 이를 경계했다”고 전했다.
이어 이제훈은 “박열이 자신의 재판 과정이 한국에서 화제가 될 수 있냐고 타진하는 용기, 딜을 하는 여유, 상황을 역이용해 제국의 본성을 고발해야 한다는 정신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수많은 압박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감을 보여준 박열을 해석해 연기해나가는 고민을 했던 배우 이제훈. 그는 이준익 감독이 박열을 미리 다 그려놓지 않고 “아무도 모른다, 이건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다”고 말해줘 너무 좋았다고 했다. 이 감독은 배우의 해석과 표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고 했다. 자신이 캐스팅된 것도 영화 ‘파수꾼’과 ‘고지전’에서 표현에 대한 에너지를 이 감독이 보고 캐스팅한 것 같다고 했다.
이제훈은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휴학하고 26세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입학해 연기를 공부했다.
“중학교 때부터 영화도 많이 보고 배우가 꿈이었다. 스크린 안 사람들이 자연스럽다. 화려함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 좋아한 일이지만, 현실에 부딪쳤다. 배우라는 직업으로 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내 친구는 졸업하고 사회 생활하고 있는데, 나는 청춘이라는 기회비용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꿈이 접혀졌을때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과 갈등을 거쳤다.”
이제훈은 “혼란기를 통해 조금 단단해진 계기가 됐다. 데뷔도 또래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속적으로 연기가 가능한 배우가 되고싶다. 아직 꺼내 보여줄게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