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 준다고 일 주나”…산업현장 ‘해석의 딜레마’

‘저녁이 있는 삶’ 기대감에도
상황별 구체적 적용기준 모호
탄력 근로시간제 확대 목소리
중소기업 매뉴얼 마련 속앓이
유명무실화 우려의 목소리도

‘과로사회’를 탈피하기 위한 주(週) 52시간 근로시간 단축 시행이 넉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산업 현장 일선에서는 혼란이 커지고 있다.

일감이 특정시기에 몰리는 업종이나 최저임금 인상 직격탄을 맞은 중소기업은 근로시간 단축 매뉴얼 마련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더불어 상황에 따른 구체적인 적용 기준을 둘러싼 모호함도 제도 시행의 걸림돌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로 인해 근로시간 단축이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기대감만 키운채 현장에서는 제도가 유명무실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일은 그대로인데 근로시간만 줄어…제도 적용 곳곳에 허점=근로시간 단축을 준비 중인 기업들은 다양한 상황에 대한 해석 기준의 부재 등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근로자들 또한 일은 그대로인데, 근로 시간만 줄었다고 불만을 내비치고 있다.

올초 시범 운영에 나선 A기업 인사팀 간부는 “시범운영 후 장ㆍ단점을 파악해 대책 마련에 나서고는 있지만 탄력근무제 적용기간 확대 등 관련 제도 개선 없이는 운신의 폭이 좁다”고 하소연했다.

일부 산업 현장에서는 시범 운영과 관련 “체감이 안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유통 대기업 마케팅직 B사원은 “일은 그대로인데 오버타임을 하지 말라는 것에 직원들의 불만이 많다”며 “결국엔 PC오프제(특정시간이 되면 PC가 꺼지는 제도)로 컴퓨터가 꺼지면 퇴근 기록 찍고 밖에 나가서 개인 노트북으로 야근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건설업체 영업직 C사원은 애매한 초과 근무시간이 골치다.

거래처 만남을 위해 회사가 있는 수원에서 서울 시내까지 가는 데만 1시간30분. 왕복 3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쳐줄지 아직 답이 없다. 거래처와 잦은 술자리도 어디까지 근무연장으로 봐줄지 의문이다.

전자업체 연구직 D사원은 줄야근이 걱정이다. 신제품 출시 전 특히 ‘이슈(오류발생)’가 생기면 연구소를 떠나 공장에서 살기 일쑤다. 근태 점검시스템도 없는 곳에서 실제 일한 시간을 누가 알아줄지 모를 일이다.

출장이 잦은 무역업체 사무직 E사원은 아예 주 52시간 근무시간 단축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출장은 노동시간에 상관없이 무조건 ‘하루 8시간 근무’로 쳐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시차가 많이 나는 곳에선 밤낮 없는 업무지시에 시달리는데 하루 8시간 근무는 언감생심이다.

납기와 품질이 생명인 중소기업은 사면초가다. 근태시스템 등 구체적인 대책없이 “업무 집중도를 높여 일찍 퇴근하자”는 공허한 구호만 나돌 뿐이다.

금형업체 F직원은 “주말에 나왔다면 대체휴무로 평일날 쉬자고 말은 나오는데 쉽지가 않다”며 “불황 속에 납기를 못 맞추거나 품질이 떨어져 다음 수주에 차질이 생기면 매출하락으로 이어져 오히려 구조조정 당할까 겁난다”고 털어놨다. 일자리 창출 대책이 고용 불안을 야기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하는 셈이다.

중소기업 G 간부는 주말 거래처 경영진 의전에 대한 비용처리를 포기했다. 전에는 잔업으로 처리돼 교통비식으로 비용을 청구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공휴일이 법정 유급 휴일이 되면서 근로시간 초과가 회사에 부담이 될까봐 앞으로는 ‘무료봉사’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 대책이 종국에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지도 미지수다.

한 재계 관계자는 “회사의 대책은 기존 인력으로 업무 집중도와 몰입도를 높이면서 생산성을 높이는 것에 초점이 맞춰 있다”며 “일자리 창출로 직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연평균’ 주 52시간 확대 적용 필요=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에 대한 부작용이 가시화함에 따라 ‘탄력적 근로시간제’ 적용범위 확대가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특정기간 주당 평균 근로시간을 지킨다는 것을 전제로 필요할 경우 추가 근무를 허용하는 제도다. 하지만 적용기간이 최대 석달에 불과한 것이 문제다.

재계 관계자는 “신제품 출시 때는 막바지에 개발, 상품기획, 디자인 등 많은 부서가 야근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출시 이후에는 여유가 생긴다”며 “주 52시간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보다는 선진국처럼 연평균이나 6개월 평균 주 52시간을 적용하는 등 탄력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독일과 일본, 프랑스 등은 탄력 근로시간제의 적용시간이 1년이다.

중소기업계에서는 ‘법개정 이후는 기업이 알아서 하라’는 정부의 태도에 큰 아쉬움을 드러냈다.

한 중소기업 임원은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인력 활용이 제한적이어서 대비하기 쉽지 않다, 컨설팅을 맡긴다고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내용도 현장과 맞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고 토로했다.

이에 “정부에서 중소기업 책임팀을 만들어 인력공급 대책이나 설비투자 자금 등 세심한 지원책을 함께 고민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천예선 기자/che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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