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로서 기존 이미지, 기존 캐릭터 깨고싶어”
[헤럴드경제=서병기 선임기자]45년차 배우 김해숙(62)은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다작 배우로는 누구보다 상위에 있다. 하지만 워낙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하기 때문에 식상해보이지 않는다. 푸근한 엄마부터 개성 강한 역할까지 다양하게 소화해낸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영화 ‘허스토리’에서는 대단한 몰입도를 보여주었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오직 본인들만의 노력으로 일본 정부에 당당히 맞선 위안부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배정길 위안부 할머니를 맡아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한 인간으로서 힘들었다. 이 분들의 아픔은 감히 내가 상상할 수가 없다.”
배정길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와 달리 대사가 거의 없다. 하지만 김해숙은 그 분의 심정을 오롯히 표현하고 전달한다.
“이 분의 심정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살아오신 분인데…일본 앞에서는 당당하고 싶었다. 하지만 슬픔을 참느라 고통스러웠다. 모든 신이 힘들었지만, 법정 신(scene)에서는 그 분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다. 과거 아픔보다는 현재도 나온다. 법정신은 이 영화의 메시지다. 끝나지 않고 앞으로 나갈 것이라는 게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김해숙은 “희노애락은 평범한 삶에서 나오는 거지, 과연 이 분들이 기쁨과 고통, 슬픔 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다른 분과도 다르게 연기했다”면서 “이 분의 깊이를 알 수 없어 힘들었지만, 가슴에 멍이 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다보니 대사 없이 보여주는 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김해숙 자신의 감정이 들어가므로 자신과의 싸움이 힘들었다는 것.
김해숙 김희애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 이번 영화에서 함께 한 배우들의 연기경력을 합하면 무려 200년이라고 한다. 김해숙은 이번 영화가 우아하고 예쁜 여배우의 향이 짙은 김희애의 새로운 연기 도전의 의미도 있다고 했다. 김해숙은 ‘허스토리’ 출연으로 많은 걸 깨달은 듯 했다.
“배우로서, 한사람으로서 뜻 깊은 일과 세상을 넓게 보는 걸 배웠다. 내가 배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게 부끄러웠다. 남의 아픔을 그렇게 주의깊게 보지 않고 살아왔다. 이 나이에 잘 살아야겠다 생각도 들었다.”
김해숙은 수많은 엄마를 연기했다. ‘허스토리’에도 아들 때문에 재판에 나간다고 했다. 현실에서도 엄마이고, 극중에서도 엄마다. 그는 “모든 엄마가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엄마이고, 그 모정은 다 같다. 나도 엄마이지만 완벽한 엄마는 못됐다”고 했다. 배우로서 열정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김해숙은 너무나 하고 싶은 배우를 40년 넘게 잘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고민은 있다. 어떤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해 다르게 보여줄 수 있는지가 가장 큰 고민이다.
“저는 한 사람인데, 작품을 많이 하면 비슷할 수도 있다. 장소, 환경, 내용은 다르게 제시되지만 내 모습은 비슷할 수도 있다. 이것과 항상 싸워야 한다. 전작과 비슷한 연기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항상 한다.”
김해숙의 과제는 엄마를 다양하게 연기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숙명이라고 했다. 하지만 엄마만을 연기하는 건 아니다. 주조연을 떠나 욕심나는 캐릭터는 카메오이건 특별출연이건 개의치 않는다. 재난영화 ‘터널’에서는 행안부 장관을, 판타지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에서는 나태지옥 재판관 초광대왕이라는 독특한 역할을 각각 소화했다. 그는 이런 캐릭터에 흥미를 느낀다.
김해숙은 이미 영화 ‘박쥐’와 ‘도둑들’ 등에서 개성있는 역할을 맡아 국제적으로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박쥐’는 박찬욱 감독이 나에게 배우로서 색다른 재능을 끄집어내주었고, ‘도둑들’은 최동훈 감독이 내 나이에도 멜로를 할 수 있게 해준 영화다. 특히 두 영화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드라마에서도 다양한 엄마역 외에도 가사도우미 소개소 소장(‘수상한 가정부’)이나 엄청난 반전이 있는 판사 출신의 로스쿨 교수(‘이판사판’)를 연기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배우로서 기존 이미지, 기존 캐릭터를 깨고싶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배역을 맡아 누군가의 삶을 연기로 보여주는 일은 여전히 긴장된다. 어린 후배들이 ‘선생님도 떠세요’라고 하지만 아직도 떨린다.”
백전노장 김해속은 “저와 함께 하는 어린 배우들을 모두 사랑한다. 저도 그들의 시기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어떻게 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면서 “그들은 내가 얼마나 무서울까? 내 역할은 어른으로서 이들을 좀 더 편하게 해줘 마음껏 연기하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상도 변하고, 드라마도 변하는 상황에서 김해숙은 어떻게 적응해나갈까? 그는 사명감을 가진다고 되는 게 아니고, 흐름에 맞춰 나의 연기 색깔을 입혀 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오랫동안 연기하며 현장에서 남는 배우가 되기 위해 건강에 신경써야 겠다고 했다. 김해숙의 차기작은 김희선과 영혼이 바뀌는 드라마 ‘나인룸’(tv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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