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서병기 선임기자]채시라가 최근 종영한 MBC 주말극 ‘이별이 떠났다’에서 보여준 연기는 연륜이란 무엇인지를 느끼게 했다. 자신을 가두고 살아온 여자 서영희 역을 맡아, 엄마로 살기 위해 포기했던 ‘나’를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격정적인 감정 변화는 물론이고 처연한 감정을 담담하고도 깊이 있게 풀어냈다. 여자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표현해 인물의 감정과 정서에 깊이 이입할 수 있게 했다. 감정선을 넓게 활용하는 그의 연기는 마치 노련한 운동선수가 공간을 넓게 사용하는 여유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선배들의 연기를 보면서 연륜은 돈 주고도 못 사고, 갖고싶다고 해서 가져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경험이란 게 큰 재산이고, 한회 한해 내가 익어간다는 느낌을 가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채시라는 평소에는 아이를 키우는 주부였다가 2~3년에 한 작품 정도 하고 있다.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는 편안한 상태를 유지한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머리를 단순화시키듯 릴랙스 상태에서 나와 긴장감보다는 기대감을 선사한다. 시청자들이 채시라에게서 못봤던 걸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 같은 것 말이다.
채시라는 작품을 선택할 때도 새로움을 모색한다. 데뷔한 지 38년이 됐지만 이 원칙은 여전히 지켜진다. 이미 2004년 KBS 드라마 ‘해신’에서 자미부인이라는 특이한 요부 캐릭터를 맡았다. 드라마속 ‘팜므 파탈’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다.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지만 자신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역이다. 좋은 역이지만 자신과 어울릴법 하지 않는다면 미련없이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 이번에도 원작인 웹소설이 신선하고 호기심이 생겨 출연하게 됐다.
“내가 끌리는 작품을 만났을 때, 내가 가진 것을 끄집어내 표현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시청자분들이 위로받고 치유받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감사한 일이고 행복한 일이다.”
채시라는 ‘이별이 떠났다’에서 서영희 캐릭터를 세세하게 표현해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의 여자인 조보아(정효 역)를 통해 과거를 되새기고 가족만 바라보는 삶이 아닌 주체적인 삶을 찾아 나선 모습으로 ‘엄마’ 캐릭터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았다. 공대를 나온 서영희는 자신이 세운 계획이 틀어지면 용납하기 힘든 캐릭터다. 채시라는 이 역할을 잘 표현하기 위해 공대 나온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참고했다. 비주얼도 가르마도 1자가 아닌 사선으로 해 복고 보다는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머리는 평소 길러놓는다. 서영희 역할을 위해 머리를 목길이에 맞춰 짧게 잘랐다.
“서영희는 3년간 집밖을 나오지 않는 여성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불륜을 행하지만 경제권을 놓치 않는 강인한 여자다. 외부에서 조보아(정효)가 들어오면서 서영희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아이가 들어와 날 흔든다. 내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안됐다.”
이런 상황들은 대사로만 전달이 되는 게 아니다. 모성을 알고, 그 세세함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채시라는 그런 표현법에 매력을 느낀다. 결혼과 엄마의 삶에 대한 민낯을 가감 없이 내비쳤다. 어둠 속에서 갇혀 지내다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하는 서영희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저력을 보여주었다.
“조보아와의 호흡이 좋았다. 내가 잘 이끌고 싶어도 후배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잘 안된다. 서로 소통이 잘돼야 하는데 그 부분이 잘됐다. 현장에서 한가지라도 더 배워가려는 조보아의 자세는 선배들도 배워야 한다. 아들 역할로 나온 이준영 또한 그 점에서는 조보아와 비슷했다. 겸손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고, 성장했다. 두 사람 보두 기본이 잘 잡혀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채시라는 남편으로 나온 이성재와는 학교 선후배 관계인데다, 현장에서 웃음을 담당하는 정웅인과도 함께 해 현장 분위기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채시라는 ‘여명의 눈동자’(1991) ‘아들과 딸’(1992) ‘서울의 달’(1994)을 통해 90년대 배우로서 정상을 밟았다. 지금은 수많은 플랫폼이 생기고 수많은 콘텐츠가 나오는 시대다. 그는 “진짜 좋은 작품만 살아남는다. 시청률은 줄어들겠지만 보석 같은 작품과 의미있는 캐릭터의 진가는 더욱 올라간다”고 말했다.
‘이별이 떠났다’를 촬영하는 기간에는 아이들을 멀리하면서 준비했다는 채시라는 전작들에서 보야주지 않았던 캐릭터를 찾겠다고 했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의사, ‘화양연화’의 장만옥 같은 역, ‘여자 테이큰’ 같은 작품과 배역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