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스토리아티스트 임희정] “한국인 정서 담긴 스토리텔러될 터”

전 세계적으로 한국의 음악과 영화, 웹툰 등이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른바 ‘한류’라는 이름으로 브랜드 네이밍 된 문화적 현상들은 스타 몇 명의 인기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한 명의 스타가 탄생하기까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재능있고 뚝심있는 수많은 아티스트의 초석이 깔려 빌드업되었기에 ‘한류’라는 문화현상들이 폭발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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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정씨는 2012년 캘리포니아 아트 스쿨을 졸업한 후, 미국 애니메이션의 산실인 디즈니 픽사 스튜디오 인턴을 시작으로 드림웍스 TV 애니메이션 섹션과 극장 애니메이션 섹션, 스펀지 밥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니켈로디언 (Nickelodeon), 아마존 산하의 Bureau of Magic 스튜디오워너브라더스를 거쳐 현재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다.

12년 동안 그녀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한 컷 한 컷을 세어본다면 얼마나 될까? 애니메이션 한 편에 평균적으로 4~5만 정도 컷이 필요하다고 하니 숫자를 계산하다 곧 포기해버렸다. 숫자를 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스토리 보드 아티스트라는 분야에 뛰어들어 그려냈던 그 수많은 컷들을 떠올려본다. 손가락과 몸의 고단함은 감히 겪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최근 할리웃 엔터테이먼트 업계에 꾸준하게 부상하고 있는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제작물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낯선 이들로부터 얻는 삶의 보편적인 모습들. 낯선 이로 미국 사회에 들어와 현재 그들의 고정된 시선을 바꿔가며 최전방에서 고전분투하고 있는 임희정씨가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묵묵히 격려하고 지원해줘야 하는 이유다.

디아스포라는 거창한 게 아니니까. 이민자 한 명 한 명이 하루하루 열심히 쌓아올린 미국에서의 삶 그 자체가 디아스포라로 기록될 충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임희정씨 같은 차세대 한인들의 이야기가 쌓여갈수록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의 ‘한류’ 파워는 점점 강해질 것이다.

스토리보드 아티스트, 임희정씨에게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된 이유와 과정을 들어봤다.  

이명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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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떻게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란 직업을 갖게 된 건가요? =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애니메이션과 그림 그리기를 좋아 했습니다. 유치원 다닐 때 처음으로 1940년도에 만들어진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 ‘판타지아’를 보게 됐는데 그때부터 그걸 따라 그리게 된 거죠. 아버지께서 회사에서 전산 업무를 담당하셨는데 제가 그리는 걸 좋아하니까 길게 펼쳐지는 전산용지를 가져다 주셨어요. 거기에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한 장 한 장 떨어지기 않고 쭉 이어지니까요… 생각해보면 그게 애니메이션에 빠져들게 된 토양이 된 것같네요.

하지만 부모님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제게 취미로 추천해주셨지 대학 전공까지는 말리셨죠. 그래서 외고에 진학했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꾸준히 엄마 눈을 속여 가며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림 그리기를 계속했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부모님이 제게 두 손 드신거죠. 미국 미대에 진학하는 것을 조건으로 제가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입학한 캘리포니아 아트 스쿨에서 처음 선택한 것은 캐릭터 디자인이었는데 당시 제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보던 픽사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리크루터가 “너는 스토리 보드 아티스트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듣고 그런 직종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습니다.

한 마디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란 정교한 그림의 완성도나 색의 화려함보다 간결한 스케치 여러 장으로 애니메이션의 기본이라 할 명료한 선의 움직임을 통해 스토리를 담아내는 건축물로 말하자면 토목공사에 해당합니다. 스토리를 선으로 담아낸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껴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픽사의 스토리 보드 인턴이 되었던 것이 제 경력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Q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은 언제 어떻게 싹을 틔웠을까요? = 앞서 말씀드렸지만 꾸준히 애니메이션을 보고 또 따라 그리고 어린 시절 제 시간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던 분야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좀더 활동적으로 제 관심사를 쫓아다녔는데 당시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컨벤션인 [코믹 월드] 이벤트가 열렸었는데 여기에 직접 참가해 부스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그려서 키 체인을 만들거나 책을 만들어서 직판매하기도 했지요. 지금 되돌아보면 아마 미술을 공부하는 것도 순수 미술인 파인 아트보다는 제게 애니메이션이나 이런 게 더 맞지 않았나 싶어요.

Q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은? 그리고 어떤 분위기의 애니메이션 장르를 좋아하나요? = 아주 어렸을때는 라이온 킹 등 디즈니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는데 좀더 성장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접하게 됐죠. 제가 가장 좋아하고 인상깊게 본 애니메이션은 [카우보이 비밥]입니다. 우주 개척시대의 현상금 헌터에 대한 이야기인데 어드벤처물을 좋아해서인지 이 작품을 오랫동안 좋아하며 기분이 다운되고 그럴 때마다 초심을 찾기 위해 다시 돌려보곤 합니다. 초심 회복을 위해 종종 보는 애니메이션 중 또 하나가 있는데 지브리 스튜디오의 [원령공주]도 그 중 하나입니다. 제 인생 손꼽는 애니메이션 두 편이죠.

특히 감독이 메시지를 겹으로 쌓아놓은 듯한 은유적인 작품을 좋아합니다. 무슨 의도로 딱 이런 식으로 표현 했을까를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들 말이죠. 제가 인생작으로 꼽는 두 작품 모두 그런 작품이고요. 개인 취향으로는 로맨스보다는 어드밴쳐, 액션, 드라마 장르를 많이 보지만 캐릭터의 감정선과 스토리 전체의 완성도가 높은 애니메이션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좋아 합니다.

Q 애니메이션 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몇 명의 스토리보드 아티스트가 어느 정도 작업 기간을 가져야 하나요? = TV 애니메이션이라면 디렉터 1명에 3팀 정도가 작업을 합니다. 1팀은 보통 2~3명이 팀으로 이루고 있죠. 많게는 디렉터를 포함해 약 10명 정도의 스토리 보드 아티스트가 작업을 하게 됩니다. TV의 경우 에피소드가 보통 12개 정도 작업되고 있는데 시즌이 연장돼 24개를 만든다면 보통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작업하게 됩니다. 요즘은 제작 기간이 좀더 타이트해지는 추세이긴 합니다.

영화용 애니메이션도 10명 정도의 스토리 아티스트가 붙어서 작업하는데 제작 프로덕션마다 다르지만 최근에는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 작업이 평균입니다. 예전 작품인 [프로즌]은 스토리 보드 완성에만 1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때 제작여건과 비교하면 속전속결이라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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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정씨가 지난 2018년 워너브라더스에 재직할 때 참여한 [DC Superhero Girls] 작품의 메인 타이틀모음집. 임희정씨가 스토리보드 작업한 것이 그대로 애니메이션의 메인 타이틀로 영상화됐을 때 이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고 뜻깊었었다고 한다.

Q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 일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 그리고 가장 보람스러웠던 일이 있을까요? = 가장 즐거웠던 일이라면 아무래도 아무 것도 모르던 픽사에서 보냈던 인턴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인턴 작업실에서 저와 함께 입사한 동기들과 밤샘작업을 하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당시 픽사에서는 인턴들에게 디지털 작업을 허락하지 않고 종이에 매직으로 스토리 보드를 한 장 한 장 그려 벽에 꽂아서는 프리젠테이션을 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이미 애니메이션에서 디지털이 모두 사용되고 있었지만 아마 애니메이션의 원형을 손가락과 몸으로 느끼도록 하는 인턴을 교육시키는 방법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업계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여 있던 픽사 스튜디오에서 존경하는 아티스트들의 멘토링을 받으며 애니메이션 사운드 트랙을 배경음 삼아 피곤함 모르고 작업하던 그때가 지금도 가끔 생각납니다.

가장 보람 찼던 일이라면 2018년 쯤 워너브라더스에 재직할 때 참여한 [DC Superhero Girls] 작품의 메인 타이틀을 제가 제작했던 것입니다. 메인 타이틀이란 흔히 오프닝 시퀀스라고도 불리는데 애니메이션 영상이 시작될 때 에피소드 앞에 노래와 함께 가장 먼저 나오는 시퀀스 입니다. 제가 그렸던 프레임 하나 하나 모두 똑같이 애니메이팅 되어 관객 앞에 보여지는데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를 택한 게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Q 애니메이션 스토리보드 아티스트 이외에 임희정씨가 꿈꾸는 다른 분야가 있는지요? =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충분히 창의력이 높은 일이긴 한데 좀더 스토리텔러로서 역할이 더 부각되고 있는 요즘과 같은 추세에서는 웹툰 작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보다 조금 더 제가 연출한 스토리가 실제 완성작으로 탄생할 확률이 높고 상업적 애니메이션에서 다루기 힘든 성숙한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분야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손으로 뭔가 꼬물꼬물 만들어내는 일에 관심이 많고 재능도 있는 것같아서 조각이나 소조같이 실제로 작품을 손으로 깎거나 빚는 것을 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귀여운 동물 조각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데 제가 만든 동물 모형들을 친구들이 매우 좋아하거든요… 그런 과정을 브이로그로 찍어 유튜브로 해도 재밌을 것 같은데… 아직은 그냥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Q 이쪽 분야에 관심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자질과 재능, 경험 등을 조언해준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가장 기본적인 자질은 내가 원하는 것을 그림이든 컬러든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이겠죠. 그렇지만 더 근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은 협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원활한 인간관계를 갖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흔히 업계에서는 좋은 애니메이터란 ▶데드라인 잘 지키기 ▶뛰어난 실력 ▶같이 일하기 좋은 성격 중 두 가지 이상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으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이 아닌 이상,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고 본인이 아무리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도 필요 없어진다면 그 그림을 놓아주는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포기하면 안되는 근거 있는 설득과 함께 이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가야 하는 기개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호 협력 하는 여러 부서의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이 매끄럽게 잘 이루어지도록 하면서 나의 생각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자신이 그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고만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좋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 특히 스토리보드 작업은 엄청난 작업 양으로 인해 몸을 혹사시키기 쉽고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번 아웃이 쉽게 오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 일한 지 12년이 넘었는데도 이 직업은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림을 빠르게 특징을 잡아 그려내면서 또한 속도 또한 빨라야 합니다. 그림 한 컷 한 컷이 집중력의 결정판인 셈이죠. 그려내야 하는 작업의 양은 뭐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이것보다 저는 스토리를 이해하고 이를 선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결국 스크립트에 대한 이해와 공감, 이를 그림으로 표현해내기 위한 소통의 능력을 밑바탕에 깔고 있어야 하는 것이라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도가 중요합니다. 단지 나만 그림을 잘 그려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지금도 꾸준히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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