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사회에 나아가 마흔대를 모두 넘긴 대학 선배들을 지난해 연말 뉴욕에서 만나게 됐다.
오랜만에 LA에서 건너온 후배를 격려(?)하기 위해 모인 대학 선배들… 한때는 탈춤반에서 후배들에게 봉산탈춤 손사위를 가르치던 선배는 현재 맨해튼에서 연봉 20만불 받는 엔지니어로 허드슨 강변을 컨퍼터블 벤츠를 타고 출·퇴근하고 있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두 번의 투옥을 경험했던 선배는 참여정부의 인권위원회 위원에, 현재는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출판사 사장으로 콜럼비아대에 연수중이었다. 여기에 초청된 게스트 한 명은 한국의 명망 있는 재야 운동가의 아들로 역시 콜럼비아대에서 연수중인 교수였다.
구성원의 성격이 이렇다 보니 이날 모임은 마치 한국의 정치비평 포럼을 뛰어넘는 수준높은(?) 대화들로 계속됐다. 헌데 이야기가 자녀 교육으로 넘어오자 이들도 영락없이 학부모, 그 자체였다.
나름대로 교육 철학을 갖고 있는 부모들이기 때문일까? 선배들의 자녀들은 내가 보기에 ‘신동’ 아니면 ‘괴짜’들만 모아놓은 듯 비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선배의 아들은 뉴욕 브로드웨이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벌였던 요요마 흉내를 내며 첼로를 켜고 판타지 소설을 쓰기 위해 밤을 새하얗게 지낸다고 했다.
이 아이는 내 딸아이와 같은 8학년이었다. 부모와 함께 인도 여행을 하고 돌아와 자신이 보고 느낀 인도 여행기를 책으로 엮어 한국의 한 출판사에 투고했다는 또 다른 선배의 아들, 이 아이는 7학년이었다.
‘신동’ 같기도 ‘괴짜’ 같기도 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순간 옆방에서 아무 생각없이 TV를 보며 깔깔거리고 있는 내 딸 아이가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지면서 갑자기 내 가슴 밑바닥에서 ‘욱’ 하는 감정이 치받쳐 올라왔다.
‘아니, 나이도 엇비슷한데… 누구는 저리 조숙하고 지네 길을 잘도 찾아가는데 재는 왜 이렇게 철이 안드는 거지?’ 바람이 귓가를 멍하게 할만큼 매서운 맨해튼 브로드웨이를 촐삭거리며 딸 아이와 함께 돌아다닐 때 느꼈던 그 친밀함도 잠시…
도대체 뭘 하면서 살 건지 아직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한 딸 아이의 한심함에 속만 부글거릴 뿐이었다.
LA로 돌아와 매일 컴퓨터에 앉아 음악 다운로드만 받는 딸 아이와 큰 소리로 싸움을 하게 된 것도 사실은 뉴욕에서의 상실감(?)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너는 맨날 인터넷에서 YO~ YO 하는 힙합(시끄럽기만 할 뿐 도대체 이해할 수 없어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음악 장르)이나 다운 받는다’며 싫은 소리를 해댈 무렵 딸 아이는 ‘엄마는 내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아냐?’며 이어폰을 빼고는 스피커 볼륨을 높였다.
스피커에서는 ‘Here Comes The Sun’, ‘Strawberry Field Forever’등 비틀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난 할 말을 잃었다. 힙합이나 듣겠거니 했던 딸 아이가 비틀즈나 레드 제플린, 퀸 등의 음악을 다운 받아 듣고 있었다. 아니 이건 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 아닌가?
그때부터 난 내가 갖고 있던 CD로, 딸애는 다운받은 파일을 비교해가며 ‘우린 음악 듣는 취향이 너무 같다’ 웃고 떠들고 볼륨을 높이고… 주말 토요일 밤을 유쾌하게 지냈다.
딸애는 잠들기 전 ‘엄마, 난 이 다음에 커서 해피하게 살고 싶어.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말야’ 눈을 반짝거리며 던지는 이 한마디는 내게 칼 처럼 꽂힌다. 늦은 시간 잠이 든 딸 아이를 내려다보며 난 자문했다.
난 ‘다른 애가 가진 재능이 내 아이에겐 보이지 않는다고 아이를 타박하진 않았는지…’, ‘내 딸 아이라면 성적은 이 정도는 돼야지… ‘무의식 중에 내게 최면을 걸고 아이를 들볶아대진 않았는지?
한국에서의 교육 환경이 싫다고… 자신 없다고 이곳까지 건너와서는 또 비교하고 채찍질하며 그렇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래저래 생각이 몰려왔다.
문제는 바로 나였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그 나이에 맞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찾아가고 탐험하고 있는 딸 아이와 달리, 이 엄마는 헬리콥터 엄마도 못되면서 조바심만 해대는 아주 못된 엄마였던 셈이다.
아무쪼록 이 못된 엄마는 딸 아이가 소망처럼 그렇게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벌면 엄마로선 좋겠지만 말이다).
이명애/미주 헤럴드경제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