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국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할 거잖아요. 여러 번 학교에서 불려다니고 소문도 나느니, 그냥 제가 해결했어요.” 중학생 A양은 최근 동급생으로부터 ‘지인능욕’ 피해를 당했다. 사이버 범죄의 한 유형인 지인능욕이란 타인의 사진에 지인의 얼굴을 합성해 유포하는 행위를 이른다. A양은 정식 학내 처분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이내 단념하고 이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폭로하는 ‘사적 복수’를 택했다.
자녀 학폭 논란으로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 사태’ 이후 마련된 새로운 학폭 예방 제도가 3월 신학기부터 시행된다. 그러나 정작 학생 사이에선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 등 정식 처분 절차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 실효성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8일 교육계 및 학폭 관련 전문가 등에 따르면 학교 현장엔 이미 정식 처분 절차를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된 지 오래다. 교원 등에 강제조사 권한이 없어 조사가 허울에 그치는 데다, 학폭위 처분은 민사소송 근거로 활용하기 위한 수단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학내 처분 대신 피해 학생이 SNS 등에 직접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경우도 다수다. 대신 이 경우엔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학교 현장에선 학폭이 발생했을 경우 정식 절차 대신 사적 복수를 택하는 것이 해법으로 떠돈다. 특히 최근엔 SNS 폭로가 흔해졌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교사 B씨는 “학폭 피해 학생이 가해자 실명과 피해내역을 상세히 써서 인스타그램 등 SNS에 직접 폭로하는 일이 최근에 많아졌다”고 했다. 학폭 사건을 전문으로 맡는 한 변호사는 “폭로를 방법으로 택했다 가해 학생으로부터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다”고 전했다.
인천 소재 한 초등학교 학교폭력 전담교사 C씨는 “초등학교에서 학폭 피해를 당한 학생 학부모가, 가해자가 중학교에 진학하면 따라가서 자료를 뿌리고, 고등학교에서도 똑같이 할 것이라고 호소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이처럼 학폭 처분 불신이 심화한 배경엔 ‘사후 조치’에 대한 불만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학내에서 학폭 신고가 접수되면, 학교장 자체 해결로 종료하는 경미한 사안 외엔 대부분 교육지원청 학폭위 처분으로 1호(서면사과)~9호(퇴학)가 결정된다. 교사 B씨는 “서면 사과란 흔히 말하는 사과 편지를 이르는데, 정작 이 편지의 양과 질에 대한 규정은 없다”며 “이면지에 ‘미안해’라고 써 피해 학생에게 주고 끝낸 사례도 있었다”고 했다.
학폭 발생 시 피·가해 학생의 즉시 분리 기간은 기존 3일에서 최근 7일로 늘어났지만, 이 역시 사실상 실효성이 없다. 교사 D씨는 “학교에 폐쇄회로(CC)TV가 있는 것도 아닌데 피해 학생이 가해 학생의 접근을 호소해도 가해 학생이 부정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학폭 건수가 매해 늘면서 정부도 대책을 마련했지만, 정작 학생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부가 ‘정순신 사태’ 이후 대책으로 마련한 새로운 학폭 제도의 핵심 골자는 ‘객관성’ 강화다. 교육부는 신학기부터 퇴직 경찰 등을 활용해 학교폭력전담조사관 2700여명을 전국에 배치할 계획이다. 수사권을 가진 경찰이 전문적으로 사안을 조사하는 동시에 교사는 관계를 회복시키는 교육적 역할만 맡도록 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강제조사’를 할 법적 권한이 없어 조사가 부실하다는 기존의 한계는 여전히 있다. 조사관 운영 형태 역시 위촉 봉사직인 탓에 전문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이해준 학교폭력연구소장은 “피·가해 학생이 학폭 조사에서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또 거짓말인 걸 안다고 해도 교사로선 그대로 적어서 진술로 제출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며 “조사관 제도 역시 이 부분에 대한 시정 없이 조사하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서울에서 학폭위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는 한 변호사 역시 “지금도 학생이 교사를 불신해 매우 부실한 진술에 의지해 처분을 내리는 사례들이 대다수인 상황”이라며 “학생에겐 더 낯선 존재인 조사관에게 얼마나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고 우려했다. 박혜원·안효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