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서 만난 배두나, 진짜 맞나…‘AI 두뇌’ 설치한 리움의 파격 [요즘 전시]

리움미술관 야외 데크에 설치된 인공지능 타워 작품 ‘막’ 모습. [리움미술관]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당신이 알던 ‘미술관 문법’이 완전히 무너진다. 단순히 배열된 작품을 관람하는 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미술관의 두뇌가 된 ‘인공지능(AI)’이 있다.

센서가 탑재된 인공지능은 미술관 밖에서 지구 상의 떨림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수집된 데이터 정보는 인공지능을 거쳐 외부와 단절된 전시장 곳곳의 작품들에게 전달된다. 이를 바탕으로 미술관 내부에 존재하는 작품들이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낸다. 그것도 논리정연한 문법 체계를 갖춘 그들만의 새로운 언어로.

“사물은 관람객과 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과 사물이 소통하는 세계를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죠.”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만난 세계적 설치미술가 필립 파레노(60)의 말 한마디가 그의 모든 작품 세계를 요약한다. 작가는 미술관을 작품에 숨을 불어넣는 거대한 생명체로 변신시켰다. 관람객은 작가가 창조한 미지의 공간에 내몰려져 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작품들이 만들어낸 연속된 우연을 만나면서 저마다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 필립 파레노 [리움미술관]

이는 파레노가 모든 작품을 ‘미완’으로 남겨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칼 구스타프 융의 ‘동시성’ 이론을 차용한 작가는 “전시장에서는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동시에 작동된다”며 “그것을 기반으로 인간은 자신만의 필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지난 달 28일 리움에서 개막한 파레노의 국내 첫 개인전 ‘보이스’(VOICES)는 무려 2년 간 준비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시다. 1990년대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파레노의 40여 점의 작품이 펼쳐진다. 리움은 M2, 블랙박스, 그라운드갤러리, 로비, 데크 등 전관을 파레노의 작품으로 채웠다. 리움이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전하기 위해 모든 전시장을 할애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작가는 지난달 초부터 서울에 머물며 3주 간 리움을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전시를 준비했다.

인공지능 타워가 느끼는 미술관 밖 세상
파레노의 신작 ‘막’. 리움미술관 야외 데크에 설치된 인공지능 타워로 42개의 센서가 탑재돼 있다. [리움미술관]

전시는 야외 데크에서 시작된다. 높이만 14m가 넘는 기계 타워처럼 보이는 신작 ‘막(膜)’이 미술관을 관통하는 그의 핵심 작품이다. 막은 42개의 센서를 탑재한 인공지능이다. 기온, 습도, 풍량, 소음, 대기오염, 미세한 진동까지…. 미술관 밖에서 벌어지는 환경 데이터를 시시각각 수집한다.

유입된 데이터는 전시장에서 다채로운 사운드로 전환된다. 미술관 내부를 부유하는 목소리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다. 작가는 “미술관은 비싼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모든 요소를 제어하는 통제된 환경”이라며 “외부와 등을 돌린 닫힌 공간에 틈을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전시에서만큼은 관습적인 사고를 철저히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껏 전시장을 헤매야 한다.

화이트 룸으로 연출된 전시 공간. 빈 말풍선 모양의 풍선이 천장에 부유해 있다. 벽을 따라 설치된 조명은 미술관 밖의 인공지능 타워와 연동돼 작동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벽이 움직인다. [리움미술관]

“42개의 센서를 가진 생명체는 인간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생명체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타워 안의 생명체도 말을 하고 싶을 것이라고 상상했죠. 언어학자와 함께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습니다. 목소리가 탁월한 배우 배두나와 엉뚱한 소리로 녹음을 했습니다. AI 학습으로 녹음된 소리를 재조합했고, 작품의 말이 된 것이죠.” (지난달 28일 파레노의 아티스트 토크(관객과의 대화)에서)

‘동사-주어-목적어’로 구성된 작가의 언어 체계가 ‘∂A’(델타 에이)다. 파레노는 멜랑꼴리한 말투로 언어를 표현하기 위해 지난해 4월 직접 캐스팅에 나섰다. 다채롭고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는 배두나의 목소리에 매료된 파레노는 전시 취지를 설명했고, 배우는 재능기부로 작품 제작에 참여했다.

전시장 관통하는 그들의 목소리

전시장 내부는 크게 네 공간으로 나뉜다. 오렌지·블루·블랙·화이트 색으로 연출된 각각의 전시 공간에서 관람객은 어떤 순간에도 같은 전시를 볼 수 없다. 막과 연동해 소리내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이다.

오렌지 룸으로 연출된 전시 공간. 전시장을 둥둥 떠다니는 물고기 풍선과 녹아 흐르는 눈이 보인다. 관람객은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닌, 관찰의 대상이 된다. [리움미술관]

특히 모든 전시장에서 부유하듯 곁을 맴도는 주인공은 단연 목소리다. 전시장 M2의 창문은 오렌지색 필름으로 덮였다. 태양이 사라진 멸망한 지구의 석양 빛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동심의 기억으로 가득했던 눈사람은 녹아 일그러지고, 공중에 떠 있는 물고기 풍선은 관람객이 어항 속에 들어온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순간 부조화된 피아노 연주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이 역시 바깥 세계의 막이 보낸 데이터가 사운드로 변환된 균열이다.

파란빛이 감도는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2차원으로 존재하는 일본 만화 캐릭터 ‘안리’가 배두나 목소리로 델타 에이 언어를 구사한다. 그의 음성이 3차원 공간에 울려퍼지는 순간 실재와 허구의 경계는 복잡하게 뒤엉킨다. 작가는 “한 번도 듣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될 때 아름다움을 느끼고 저마다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된다”고 말한다.

블루 룸으로 연출된 전시 공간. 새로운 언어 체계 ‘델타 에이’를 구사하는 일본 캐릭터 안리의 모습.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를 낸다. [리움미술관]

오는 11월부터는 독일 뮌헨의 미술관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도 파레노의 전시가 열린다. 리움과 같은 주제로 진행되는 마치 이란성 쌍둥이 같은 전시다. 다만 한국에서의 전시가 감정적으로 표현됐다면, 독일에서의 전시는 보다 이성적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파레노의 전시는 ‘보는’ 전시가 아니다. 관람객이 그 안에서 시간을 경험해야 하는 ‘공연’ 같은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는 7월 7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기준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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