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꺼내들자…기억 잃어가는 엄마는 천진한 아이가 됐다 [요즘 전시]

셰릴 세인트 온지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는 인지저하증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찍은 사진 작품이다. 기억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다시 유년기로 돌아가는 듯한 어머니의 밝은 모습을 포착해, 인지저하증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꾀한다. [포도뮤지엄]

[헤럴드경제(제주)=이정아 기자] 희미한 햇살이 번지는 겨울, 어느 일요일이었다. 엄마는 점점 기억을 잃고 있었다. 수십 년간 딸과 함께 보낸 농장에 있지만, 그는 여기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스러져가는 엄마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딸의 시선은 끝내 그의 주름진 맨살에 닿았다.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듯 보이는 피부. 그런데 보드랍다. 딸은 한동안 내려놨던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흩날리는 엄마의 백발이 햇빛에 반짝거려 눈이 부셨다. 생의 가장 극단적인 순간에 다다른 엄마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포즈를 취했다. 사라질수록 더 강하게 남는 기억만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듯이.

“2015년 혈관성 치매를 진단받은 어머니의 투병은 비극적인 경험이었어요. 그렇지만 제 사진에는 슬픔과 어두움이 없습니다. 순수한 행복만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사진작가 셰릴 세인트 온지)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전시를 기획한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 디렉터가 전시 작품과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포도뮤지엄]

오는 20일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에서 과거를 현재 속에서 재해석한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전시가 개막한다. 초고령화 사회 문턱 앞에 서 있는 시점에서, 노화와 치매를 매개로 기억과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전시다.

세계적인 거장으로 꼽히는 로버트 테리엔, 루이스 부르주아를 비롯해 국내 작가 정연두, 민예은까지. 참여 작가 10명의 서로 다른 작품 세계가 마치 벤다이어그램의 교집합처럼 중첩돼 인간이 가진 기억의 불완전성을 따스하게 돌아본다. 작품만 해도 설치 미술부터 사진, 조각, 영상, 회화, 사운드 등 여러 매체를 아우른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밀실 1’ 은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으로, 노화와 고립을 상징하는 공간을 통해 내면의 경계와 감정의 복합성을 드러낸다. [포도뮤지엄]
포도뮤지엄이 20일 시작하는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개막에 앞서 18일 전시 참여 작가들과의 대화 시간을 마련해 전시 기획 의도와 작품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포도뮤지엄]

지난 18일 전시장에서 만난 티앤씨재단 이사장인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 디렉터는 “인지저하증에 집중해 한 사람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고독의 순간을 예술적 시선으로 다가가고자 한 기획”이라며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취약함에 공감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존엄함을 발견해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시장 곳곳에서는 무수히 많은 시선을 교차해 아름다운 날들을 함께 그려나가길 바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전시의 서막은 분명 존재하지만 깨져버려 읽을 수 없는 이미지 파일이 가득한 16:9 비율의 벽면(알란 벨처)과 ‘나에게 기억이 필요하다’고 말을 거는 누군가의 낡고 색이 바랜 고립된 방(루이스 부르주아)이다. 기억한다고 믿는 내용과 실제로 기억하는 내용은 왜 다른가. 더 이상 기억해 낼 수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가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다.

특히 이번에 전시된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밀실(Cell)’ 연작 중 첫 번째 작품(1991)으로, 이번 기획전을 위해 작품을 소장한 글렌스톤 뮤지엄 측이 선뜻 대여해 줬다는 후문이다.

민예은의 ‘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 때’는 기억의 불완전성과 변형 가능성을 시공간적 설치로 표현한다. [포도뮤지엄]
시오타 치하루의 ‘끝없는 선’은 언어와 문자로 이루어진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포도뮤지엄]

이어 전시는 희미해져가는 엄마의 기억을 기록하고(셰릴 세인트 온지), 과거 기억을 구술하는 평범한 노인들의 인터뷰 영상에 따라 이야기 속 장면을 연극 무대로 재현하는(정연두) 작품들로 채워졌다. 소실되어 가는 과거가 현재 속에서 재해석 돼 되살아나는 과정이 때론 위트 있게, 때론 무게감 있게 전해진다.

이내 파편화 돼 부서졌지만 그 자체가 또 다른 풍경이 되거나(데이비스 벅스) 구조를 잃고 해체된 문자가 공중에서 자유롭게 흩어진(시오타 치하루) 작품에 다다르게 되면 역설적으로 충만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맥락을 이어붙인 기억의 집합으로 살아가지만, 그 일부 기억이 영원히 사라진다해도 한 인간의 존재가 무력해지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실재하는 과거의 기억은 얼마든지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간다. 결국 뇌에 저장된 조각들에 의미를 부여한 우리는 현재의 자아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서사 구조를 만들며 기억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날 데이비스 벅스도 “우리의 기억과 추억은 특정 시간대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며 “기억과 추억은 지금 현재 우리 마음 속에서 어떻게 재해석을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뮤지션 더 케어테이커와 화가 이반 실의 공동작업 ‘텅 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는 기억과 인지가 서서히 상실되는 과정을 음악과 회화로 표현한다. [포도뮤지엄]

침잠의 시간으로 관람객을 초대하는, 짙푸른 빛이 감도는 전시장도 연출됐다. 오래된 레코드판(LP)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악이 감돌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정물이 그려진 회화들이 걸렸다. 뮤지션 더 케어테이어와 화가 이반 실 작가의 협업 작품으로 구성된 공간으로, 특히 외부세계에 대한 기억과 인지가 점차 소실되어 가는 과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뒤틀리는 사운드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김 총괄 디렉터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섭외하게 된 작가의 작품”이라며 “이로 인해 전시의 전체적인 맥락을 잡고 서사를 뻗어나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 총괄 디렉터가 구성한 테마 공간 ‘날 잊지 말아요(Forget Me Not)’는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의 집 마당에서 100년을 산, 그러나 얼어붙어 생을 마감한 배롱나무가 6m 설치미술로 되살아났다. 지난해 포도뮤지엄에서 진행한 ‘추억의 비디오’ 공모전에 참여한 이들의 실제 비디오 영상이 나무를 감싼다. 눈을 지긋이 감고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종이 위에 그리는 관람객 참여형 프로젝트도 진행된다.

전시는 내년 3월 20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기준 1만원.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전시를 기획한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 디렉터가 전시 작품과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포도뮤지엄]
포도뮤지엄이 직접 기획한 테마 공간 ‘Forget Me Not’은 몰입형 예술 작품으로 전시장 안에 100년의 생을 마감한 배롱나무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표현해 생명의 순환력을 담았다. [포도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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